어느 환자의 마지막 소원 (24화)

1983년 12월 어느 날, 진료실 창밖으로 하염없이 눈송이가 날리고 있었다.

휘날리는 눈꽃은 닿기만 하면 사르르 녹아 없어진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눈꽃을 손으로 잡아 보관하고 싶은 심정이다. 우리네 인생도 눈 녹듯이 언젠가는 소리 없이 녹아버리겠지. 눈이 내리는 오후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급한 환자가 왔으니 빨리 내려오라는 연락이 왔다. 서둘러 응급실로 달려갔다.

침대마다 촌각을 다투는 응급환자가 의사 선생님을 기다린다. 각 과 담당 의사는 한 생명이라도 놓칠세라 달려와 응급 처치를 하는가 하면, 커튼으로 가려진 침대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린다. 그 좁은 공간과 비명 사이를 헤치고 나의 환자를 찾았다. 거의 6년을 백혈병으로 투병하던 하OO 씨가 의식불명 상태로 응급실에 들어왔다.

‘아, 이제는 끝났구나.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정성을 다했는데….’

허탈하였다. 그는 창백한 얼굴에 의식도 없이, 가발도 벗은 채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의 옆에는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부인이 맥없이 서 있고 환자는 이미 뇌출혈로 동공이 확대된 채 희망이 없는 상태였다. 부인은 입술을 깨물면서 넋이 나간 듯 무표정하게 그의 옆에 서 있었다. 그동안 수없이 체념하였건만 기적적으로 다시 회생하였기에 행여나 이번에도 살아날 수 있는지 몇 번이고 확인해 본다. 참으로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환자는 암과 더불어 즐겁게 살아가고 있었다.

자신의 병을 알고도 모르는 척, 주치의의 지시를

잘 따라 주었던 그 환자는 그 다음 달에 이 세상...

한 달 전만 해도 그는 명랑한 얼굴로 모 잡지사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원고 청탁을 받았다. 6년간의 투병 생활을 하면서 그동안의 힘들었던 과정과 자신의 심정을 소상하고 진솔하게 표현했다. 그렇게 혼자 깊게 생각하고 자아와 대화를 하고 가족을 위해 자기의 생각을 표출하지 않고 참았던 그에게 존경과 경의를 보내고 싶었다.

과연 의사로서 환자에게 얼마나 솔직해야 할까? 환자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은 용서가 될 수 있을까? 혈액종양내과를 전공한 나로서 해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지금이야 당연히 환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주어 환자 스스로 결정하고 견디는 시대가 되었지만, 1980년대는 환자에게 직설적으로 암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100세 시대로 향하고 있는 요즘, 고령의 부모님이 암에 걸렸을 때, 항암 치료를 해야 하는지, 과연 항암 약물에 버틸 수 있는지, 남은 삶을 편히 지내시게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인정에 이끌려 환자가 암이라는 것을 알면 충격을 받아 생명이 단축될까 우려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의학의 발달로 혈액암은 골수이식을, 다른 종양은 새로운 면역항암제의 개발로 눈부신 생존율을 자랑하고 있다.

또 환자는 암과 싸워 승리하는 경우가 많아 암 보험과 더불어 암과 같이 사는 시대가 되었다.

이 환자는 처음 모 대학 병원에 갔다가 의무 기록지에 Leukemia(백혈병)라는 진단명을 발견하고 사전을 찾아 병명을 확인하여 자신이 치료하기 어려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그 후 나를 찾아와 치료하면서 자신의 병명을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이 지시에 따라 치료하겠노라고 하는 순한 환자였다.

▲ 국립의료원 시절 / 앞 줄 오른쪽에서 2번째가 필자

그의 진단명은 Erythroleukemia(적백혈병)이었다. 나는 늘 “당신은 빈혈이 심해서 치료를 주기적으로 받아야 한다.”고만 말하고 부인과 직장 상사에게 향후 문제를 논의하였다. 다행히 회사에서는 진단서를 제출하면 휴직 처리를 하여 도와주겠다고 했다.

진단서에는 재생불량성 빈혈로 기재하고 환자가 직접 제출하게 하였다. 직장의 동료와 상사는 이미 알고 있는 터라 격려와 동정으로 위로해 주면서 휴직을 연장해 나갔다. 부인과 어린 자녀들도 그의 치료에 협조를 잘해 주었다.

환자가 충격을 받을까 백혈병이 아닌 진단명을 써 주었지만, 환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의사까지 ‘나를 속이면서 치료를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지만 모르는 척 지내 온 것이다.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는 주치의 치료에 순순히 응하면서 몇 개월이라도 더 살아야겠다는 욕망으로 열심히 항암치료를 받았다. 나는 늘 “앞으로 더 좋은 약이 나오면 완치될 수 있으니 열심히 치료받으라.”고 권고했다.

얼마 후 그는 완전 관해 상태로 거의 정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때가 1차 관해였다. 그러나 유지요법은 계속되었으며 머리는 다 빠져서 가발을 쓰게 되었지만, 항상 열심이고 긍정적이었다. 점차 전신상태가 호전되면서 머리도 나고 직장도 다니게 되었다. 환자는 이 상태가 지속되었으면 하고 바랐으나 1년 6개월 후 재발하였다.

또다시 치료는 시작되었다. 다행히 2차 관해가 되어 정상 생활을 하는 도중 부인이 유방에 덩어리가 만져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환자는 그 사실을 나에게 알리지 않았다. 부인이 암이면 누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날 것인가 생각하니 나에게 알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백혈병 환자 자신이 보호자가 되어 부인을 데리고 원자력병원을 찾았다. 조직 검사를 하고 기다리는 기간은 수십 년 같이 지루하였다고 했다. 다행히 양성 종양으로 나와 간단한 제거 수술을 받았다고 그는 투병기에 고백하였다.

부인은 다시 환하게 웃으며 보호자가 되어 나를 찾아왔다. 그 후 얼마 있다가 환자는 다시 입원하였고 또다시 퇴원과 입원을 반복하면서 모 잡지에 투병기를 쓰게 되었다. 그 원고의 내용은 자신은 이미 자기의 병을 알고 있었고, 의사로부터 백혈병이라는 잔인한 병명을 듣고 싶지 않아 모르는 척하였지만, 의사가 환자에게 진단명을 정확하게 가르쳐 주는 것이 바람직한지 아닌지를 물었다. 의사들은 생각해 봐야 한다.

폐암을 진단받은 고령의 환자와 딸이 찾아 왔다. 그는 심한 빈혈 상태였으며 탈수가 심하고 폐암 진단을 받느라 갖가지 검사를 하여 몹시 지친 상태였다. 보호자는 고령의 아버지에게 항암 치료를 받으라는 대학병원 교수의 권고를 받고 상의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이미 가족회의를 열어 항암 치료는 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지만, 혹시 가능한지를 타진하기 위해서란다.

난 항암 치료를 논하기 전 환자의 전신상태부터 호전시키자고 제안하였다. 일단 항암 치료를 거부하니 어떠한 위험한 상황이 닥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노라고 확답을 받고 대증적으로 치료를 시작하였다. 빈혈 치료를 하면서 탈수상태를 해결하고 정신적으로 안정을 시켰다. 환자는 빠른 속도로 회복이 되면서 식사도 잘하고 전신 상태가 호전되어 정상 생활을 하게 되었다.

환자에게 암이라는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는 보호자의 제의를 받고 기본 질환인 당뇨, 고혈압만 치료하였다. 환자는 암과 더불어 즐겁게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고령의 환자는 암세포가 늑장을 부려 서서히 자라는 면도 있지만, 암을 알려 스트레스를 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 조바심을 내지 않고 한 달에 한 번 씩 즐겁게, 지금까지도 내 진료실을 방문한다.

자신의 병을 알고도 모르는 척, 주치의의 지시를 잘 따라 주었던 그 환자는 그 다음 달에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의 글귀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나의 마지막 소원은 현재 6학년 막내딸이 결혼하는 날, 이 아빠의 손으로 데려다주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