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공에서의 진료
하늘을 날고 있는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하얗게 질린 만삭의 부인이 의자에 앉아 간신히 고통을 참고 있다. 의자 밑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발견한 승무원은 놀라 그녀를 부축하여 다른 자리로 옮긴다.
“환자가 생겼으니 의사분이 있으면 빨리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다급하게 기내 방송을 해보지만 선뜻 나서는 의사가 없었다. 부인의 진통이 시작되고 하는 수없이 모든 승무원들이 출산 준비를 한다. 알라스카에 불시착을 시도하자고 부기장이 기장에게 강력히 건의한다. 그러나 불시착 할 조건이 되지 않아 만에 하나 사고가 나면 270명의 생명이 위험 하다고 기장은 고개를 젓는다.
부기장과 언쟁이 오간다. 그때 기장이 “출산할 산모는 내 아내야! 한 사람 생명보다 270명 생명이 더 소중해!”라고 잘라 말한다. 결국 승무원들은 불안에 떨며 아기를 받는다. 경황없이 아기는 세상에 나왔지만 산모는 심한 출혈로 사망하게 된다. 그 아이가 자라면서 부기장과의 인연이 계속 이어진다. 〈부탁해요 캡틴〉이라는 TV드라마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되는 세계심장학회에 남편과 함께 참석하는 길
비행기에서 심한 복통과 구토, 설사로 탈진한 미국인 여자를 진료하게 돼
창공에서 발병한 환자를 무사히 도착시킬 수 있어서 보람
2009년에 내가 겪은 일이 생각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되는 세계심장학회에 남편과 함께 참석하는 길에 뉴욕에 사는 딸네 식구들도 만날 목적으로 비행기를 탑승하였다.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음악을 듣다가 잠이 들었는데 승무원이 “원장님!” 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깨웠다. 갑자기 환자가 생겼으니 진찰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네!” 하고 황급히 일어났다.
환자는 63세 미국 여자였는데 심한 복통과 구토, 설사로 탈진한 상태였다. 문진한 결과 낮에 인천 공항에서 햄버거와 콜라를 급하게 먹었는데 물 마신 것까지 다 토하고 설사가 심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간단한 질환으로 생각하고 세균에 의한 장염이나 단순 위경련을 의심하였다. 혹시 세균에 의한 식중독이 아닐까 싶었지만 인천공항의 국제적인 위신을 생각해서 조금 지켜보자고 했다. 그리고 내가 비상시 복용 하려고 준비했던 약 2봉을 주었다. 이제 진정될 거라고 안심시키고 한 봉을 먹이고 자리로 돌아 왔다.
10분 후 다시 승무원이 와서, 그 약을 먹고도 다 토했다고 알려주었다. 순간 심장 하부에 오는 급성심근경색이 의심 되었다. 평소 혈압 약을 복용하고 있는 비만한 환자로 처음 시작된 증상이 명치통증과 구토였기 때문이다. 담요를 깔고 환자를 바닥에 눕혔다. 팽만한 복부의 통증과 함께 우측 하복부에 반사성 압통도 있어 급성 충수염도 생각했다.
아직도 착륙 시간은 5시간이나 남았는데…. 나의 진료실이라면 심전도 검사와 혈액검사만 해도 쉽게 진단이 될 터인데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혈압을 측정해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급히 승무원에게 심장내과 교수인 남편을 불러달라고 했다. 남편은 혈압이 210/75mmhg나 되는 환자를 진찰하고는 나이가 들면 수축기 혈압과 확장기 혈압의 차이가 많이 날 수 있다고 걱정 말고 조금 기다려 보라고 했다.
혈압 약을 복용하는 환자가 설사해서 죽는 법은 없다고 팽창된 복부를 진정시키면서 “내손은 약손!” 하며 긴장하고 있는 사람들을 웃게 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그러나 나는 안심할 수가 없어 승무원에게 급성충수염도 의심되니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는 대로 병원으로 이송할 구급차를 준비하라고 하였다.
환자는 일등실로 옮겨 똑바로 눕힌 상태에서 금식시키고 지켜보기로 하였다. 얼마 후 혈압은 190/70, 170/70으로 점차 떨어지고 환자는 진정되기 시작하였다. 다시 약을 한 봉 더 먹였다. 이번에는 토하지 않았다. 환자는 점차 호전되어 복부팽창도 압통도 가라앉았다.
요구르트를 먹으면 안 되느냐는 문의가 왔다. 아무 것도 먹지 말고 금식 하라고 했다. 도착할 때 쯤 승무원이 밝은 표정으로 와서 환자는 그 후 한 번도 토하지 않고 설사도 없어 구급차는 취소하고 휠체어를 탈거라고 했다.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30여명이나 탑승한 심장내과 교수들을 놔두고 나를 찾아, 잠도 못자게 하고 혹사를 시킨 건 개원내과 의사가 나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지 못한 비행이었으나 창공에서 발병한 외국인을 무사히 도착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이 가슴 뿌듯했다.
그날 진료를 통해 의사들은 반드시 비행기를 탈 때 비상용 약으로 심근경색, 협심증 환자를 위한 니트로글리세린, 진경제와 소화제 정도는 꼭 챙겨야 한다는 것을 실감 했다.
학회를 마치고 서울로 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 하니 KAL 지사장이 나와, 응급 환자를 잘 치료 해주어 비행기가 회항하지 않고 무사히 도착하여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진료실에 돌아오니 감사의 편지와 조그마한 선물(시계)이 놓여 있었다. 후에 응급 환자를 치료해 준 이야기를 의협신문 칼럼에 기고했더니 10만 의사들에게 탑승할 때 비상용 약을 준비해야 한다는 홍보를 해주어 고맙다며 항공사에서 감사패까지 보내왔다. 그 여행이야말로 참으로 기분 좋고 보람 된 추억으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