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품을 든 한국의 어린이 (2화)
  제1장 매화꽃 반지의 여행

6·25 전쟁이 터지자 우리 식구는 하염없이 가다 쉬다 하는, 지붕도 없는 기차에 몸을 싣고 고향인 경남 웅천으로 내려갔다. 기차 안에서 엄마의 등에 업힌 나는 답답한 나머지 손닿는 대로 움켜쥐고 버둥거리다 엄마의 모시 적삼을 찢었단다. 

열차가 잠시 멈추자, 10살 된 오빠가 개울로 내려가 도시락 뚜껑에 떠온 물에 미숫가루를 타서 3식구가 연명을 하였다. 만약 물을 구하러 갔다가 기차를 놓쳤다면….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웅천은 집안 식구가 다 모이기로 한 피난처이며 의사이신 큰아버님 세 분도 가족들을 데리고 오셨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그 작은 마을은 할아버지가 산천을 다니다 가장 아름다운 곳에 안착을 하신 곳이며 조상들의 산소가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수개월 동안의 피난 생활은 집안의 사촌, 육촌 간의 우애와 협동심을 이끌어 온 원동력이 되었다. 친정에선 대소사가 있으면 그 많은 인원을 일일이 출석을 부를 정도로 참석률이 높다. 혼사가 있으면 대략 30~40명의 친척들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준다. 

나는 막내 댁 막내딸이어서 조카가 많다. 그들도 이제 흰머리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왕조카들이다. 어느새 시집 장가 간 손주들이 “왕 할머니!” 하고 몰려오면 일일이 안부를 묻기도 난감할 정도이다. 

혼사 때마다 이집 저집 몰려다니던 ‘가족부대’가 이제는 점점 그 인원이 축소되어간다.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날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부모님 세대는 가고 한 분 두 분 떠나는 분들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나의 순서도 생각하게 된다. 

이제는 제 3대가 전면에 나서고 예전처럼 애틋하게 지내기가 어렵다. 서운하지만, 이런 현상은 어쩌면 자연의 법칙일 수도 있다.  


"한국전쟁 피난살이를 하며 사촌들과 우애와 협동심을 배워...
TV에서 보는 뼈만 남은 앙상한 얼굴의 아프리카 아이의 모습을 보며,  
구호품을 들고 미군과 찍은 나의 사진은 '구호품을 든 한국 어린이'였을까." 


피난 생활을 끝내고 돌아오니 집은 온데 간데 없었다. 정원에는 폭격을 맞아 불에 탄 살구나무, 대나무 등이 까맣게 그을려 있고 그 사이로 살겠다고 빼곡히 순을 내밀고 있는 새싹들이 애처로워 보였다. 

연못은 간신히 형체만 유지하고 주위의 바위들도 폭격을 맞아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집은 잿더미로 변해 무덤을 만들고 있었고 외할아버지가 그 속에서 호미로 살림살이를 하나하나 캐내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 혼자 약목에서 외갓집 식구들과 함께 지내며 눈칫밥(?)을 먹던 기억이 난다. 먼지가 풀풀 나는 신작로를 바라보며 언니, 오빠 공부 시키러 대구에 가신 엄마가 ‘언제 나를 데리러 오나?’ 하고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그때를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기다림의 지루함이 뼈아프게 느껴진다. 
 
▲ 초등생 시절 동급생 친구들과 /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필자이다. 6.25전쟁 피난갔다가 돌아와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이때 오빠를 공부시키기 위해 대구에 가신 엄마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는데,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루함과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시절엔 화롯불에 된장찌개 뚝배기를 얹어 놓고 보글보글 끓여 갈치 한 토막에 온 식구가 둘러앉아 따뜻한 흰쌀밥은 언제나 먹을 수 있으려나 생각했다. “밥이 없으면 라면 먹으면 되지!” 하는 요즈음 아이들은 그 시절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지금 힘들지만, 옛말하고 살날이 있을 거야.” 하고 용기를 북돋우어 주시곤 하였다. 바로 그 말씀이 나를 견디게 하였고 현재의 안정과 발전을 이루게 하였다고 생각한다.

한국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군으로부터 구호물자가 배급되었다. 어느 날 동장 아저씨가 티켓 한 장을 주면서 배급을 받으러 가라고 하였다. 얼른 달려갔더니 이미 많은 어른과 아이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내 순서가 되었다. 미군들이 무언가 한동안 얘기를 나누더니 큰 봉지 하나를 주었다. 

나는 그 봉지를 들고 미군과 함께 사진촬영을 하였다. 봉지를 뜯어보니 나에게 딱 맞는 예쁜 빨간색 모직스웨터였다. 그 당시 미제 스웨터는 참으로 귀하여 친구들이 몹시 부러워했다. 오랫동안 즐겨 입으며 미국은 대체 얼마나 잘 사는 나라인가? 하고 동경하였다.

요즘 TV에선 구호의 손길을 기다리는 뼈만 남은 앙상한 얼굴에 까만 눈동자의 아프리카 아기가 힘없이 암죽을 핥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니 그 당시 우리의 전쟁고아들도 저렇게 세계의 언론에 보도되었을 거라고 생각된다. 

또한, 내가 구호품을 들고 찍은 사진이 행여 ‘구호품을 든 한국 어린이’라고 보도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씁쓸해진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도 당당하다. 받은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되었으니까.

 
  마음을 울린 카드 한 장 (1화)
  매화꽃 반지의 여행 (3화)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