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주부의 체험 (6화)

맛깔스럽게 잘 익은 김치를 보면 잊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국립의료원에서 스태프로 재직 중 덴마크로 연수를 가게 되었다. 도착한 곳은 덴마크 북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 ‘올보르’이다. 이 도시는 덴마크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라고 하지만 인적이 드물고 도시 전체가 한적하며 고요했다.

시내 한가운데 있는 공원은 울창한 나무가 하늘을 덮고 있다. 그 사이 좁은 길에는 개를 데리고 여유롭게 산책하는 노부부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새하얀 머리와 뽀얀 피부, 엉거주춤 등이 굽고 천천히, 지팡이에 의존하며 걸어가는 노부부의 모습이 북유럽의 가을을 더욱 울적하게 만든다.

기세등등하던 푸른 잎은 누런색으로 변해 뒹굴고 늦가을의 정취가 느껴진다. 오후 4시쯤이면 어둠이 찾아와 도시는 적막강산이다. 레이스가 드리워진 창문 사이로 불빛이 은은히 비치는데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백야가 있는 이곳에 스산한 바람까지 더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북유럽 늦가을은 외로움을 더하게 한다.

백화점도 상가도 오후 4시면 문을 닫는다. 기숙사에 입소한 후 식당에 처음 갔을 때 낯설지 않은 음식을 만날 수 있었다. 국립의료원 내 스칸디나비아 클럽에서 자주 접하던 음식이기 때문이다. 훈제연어, 청어절임, 조개죽, 청어샐러드 등이 있었고 찬 음식과 더운 음식을 구분해서 먹는 것이 특징이다.

"덴마크 연수 중 김치생각 간절

백화점에서 재료를 사다 김치를 담갔지만, 실패...

그 후 소금을 잔뜩 뿌려 다시 담가, 맛은 짰지만 김치는 김치."

안초비는 소금에 절인 멸치인데, 다져서 각종 재료와 함께 넣고 오븐에 구운 음식은 우리네 전통 양념을 한 것과 맛이 비슷하다. 버터와 밀가루를 볶아 만든 반죽에 소간과 양파, 달걀흰자를 갈아 섞은 뒤 오븐에 구운 요리는 독특한 향과 맛이 특이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김치 생각이 간절하였다. 어느 날 기숙사 부엌에 갔더니 통마늘이 주렁주렁 엮여 매달려 있었다. 나는 이 나라 사람들도 마늘을 먹는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김치를 담아보기로 하였다.

병원 근무도 단축하고 오후 4시에 백화점으로 향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배추가 아닌 중국 배추였다. 한 포기를 사서 기숙사에 와 한 밤중에 김치를 담그기 위해 싱크대를 여니 주둥이가 넓은 포도주 병이 있지 않은가. 배추를 납작납작하게 썰고 소금을 뿌렸다. 한국에서 갖고 온 고춧가루를 뿌리고 마늘을 다져 넣었다. 잘 섞이게 하려고 뚜껑을 닫고 마구 흔들었다.

‘이제 일주일이면 맛있는 김치가 되겠지’ 하고 부엌에 있는 나의 보관함 속에 넣었다. 일주일 후 맛있는 김치를 기대하면서 병뚜껑을 열었다. 이게 웬일인가? 김치가 되기는커녕 음식 썩는 냄새가 나지 않는가? 너무나 놀라 다른 동료들이 알게 될까봐 얼른 뚜껑을 닫고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렸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속이 시원했다. 높은 층에서도, 구멍이 있어 쓰레기를 넣으면 아래로 떨어져 쓰레기 창고로 모이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시설은 건물을 지을 때 설계를 한 것이라 배울 점이라고 생각하였다.

▲ 필자를 덴마크에 초청한 Dr. Laursen 교수와

나는 고민했다. 왜 김치가 되지 않았을까? 수일 후 오후스에 있는 흉부외과 김창호 교수님 댁에 초대받아 가게 되었다. 한국인이 없는 곳에 있다가 한국인을 만나 한국말을 할 수 있어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그동안 한국말 한마디 못 하고 두고 온 어린 네 아이와 남편, 온 가족이 보고 싶어 전화통 붙들고 많이 울었다.

어느 교수는 외국에서 너무나 외로워 음악회를 찾아 외로움을 달랬다고 한다. 그때 슈베르트의 가곡이 연주되었는데, 가사와 곡이 너무나 마음에 와 닿아 그때의 추억이 잊히지 않아 지금도 머리와 안경을 슈베르트와 똑같이 하고 다닌단다.

나는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짙은 체리 핑크의 실로 두 딸의 모자와 스웨터를 뜨개질하였다. 요즘 미국서 온 손녀가 그 모자를 즐겨 쓰고 다니는 것을 보면 그때가 문득 생각나곤 한다.

한국서 오신 다른 교수님과 함께 대서양 밤바다에서 낚시를 한 적이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대서양 밤바다는 온 세상이 하나가 된 우주 공간 같았다. 한없이 넓은 바다의 적막을 깨고 출렁이는 파도 소리는 저음의 첼로 연주이며 이따금 애처롭게 들리는 뱃고동 소리는 트럼펫 연주, 까만 하늘에 켜졌다 사라지는 등대 불빛은 무대를 장식하는 조명으로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한밤의 오케스트라 공연장이 된다.

나는 이 넓은 우주의 밤기운을 만끽하면서 낚싯대를 드리우는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힘껏 낚싯대를 던졌다. 온 힘을 다해 낚싯줄을 잡아당기니 난생 처음 팔뚝만 한 고기가 펄떡이며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나도 해냈다는 성취감에 낚싯줄을 던졌다. 다른 교수님도 계속 줄을 감아 던지고 올리고 밤새 낚싯줄에 걸린 고기는 스무 마리가 넘었다.

김 교수님 사모님은 반가워하며 잡아온 생선이 대구라며 매운탕과 구이를 하느라 바빴다. 남은 대구는 말려서 포를 만든다고 빨랫줄에 주렁주렁 매달았다. 나는 사모님께 “제가 김치를 담았는데 썩은 냄새가 나서 버렸어요.” 라고 했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소금에 절이지 않았나?” 하신다.

다음 날 아침 이슬이 뽀얗게 내린 나지막한 주택의 뒷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두어 그루의 자두나무가 있는 파란 잔디밭에는 새빨갛다 못해 까만색으로 변한 자두들이 뚝뚝 떨어져 잔디 위를 뒹굴고 있었다.

사모님은 멀리서 온 손님을 위해 갓 구운 빵을 사 오셨다. 손수 만드신 자두 잼과 갓 볶은 커피로 아침상을 차리셨다. 덴마크 고유의 의상을 바탕으로 수를 놓은 식탁보와 예쁜 덴마크 전통 문양의 커피 잔, 레이스로 장식된 빵 바구니, 덴마크 특유의 무늬가 있는 과일 접시… 그 날의 아침 식사는 환상적이었다. 덴마크의 정취가 마음에 담겨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 베를린의 독일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남편 조승연 교수와

3개월 후 남편이 교환 교수로 프랑크푸르트 의과대학 심장내과에 근무하게 되었다. 남편도 김치가 먹고 싶어 주문한 터라 다시 용기를 내었다. 김치를 실패한 이유를 파악하고 배추 두 포기를 사왔다. 나는 아는 척 하면서 소금을 잔뜩 뿌려 24시간 절여놓았다.

다음 날 저녁, 배추는 극도로 탈수가 되어 쪼글쪼글해졌다. 과거에 어머니가 배추 씻는 것을 본 적이 있어 얼른 물에 씻었다. 마늘을 다져 넣고 고춧가루를 넣어 주둥이가 넓은 병에다 뚜껑을 꽉 닫고 보관하였다.

며칠을 후 열어보았더니 새큼한 냄새와 함께 김치가 된 것이다. 양도 모르고 뿌린 소금의 덕분으로 너무나 짜지만, 매운맛과 마늘 맛이 어우러져 분명 김치는 김치였다. 오래 먹지 못했던 김치였기에 꿀맛이었다.

주부 실습을 해본 적 없는 나에게 김치담기의 실패를 통해 다시 한 번 이론보다 실습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앞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보리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