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지난 날 보람 있었던 하루하루를 되짚어본다.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그 누구라도 현재보다 더 멋진 삶을 갈망할 것이다. 인생을 지우개로 지우고 새로 쓸 수 있다면 그토록 고뇌하며 인생을 논하는 철학자도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멈출 수 없는 시간을 안타까워하던 나도 어느덧 빛이 스러지는 저녁 무렵의 시점에 와 있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청춘의 사막을 트래킹 하던 시절을 생각해 본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네 명의 자녀와 우리 부부가 일생을 바친 학문이다. 지나온 시절, 남편은 자신의 전공인 심장내과에 몰두하여 청춘을 불태웠고 이제는 치열한 전쟁터에서 물러나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나의 전공분야인 혈액암은 아스라이 기억 저편에 남아 가끔 떠올려 곱씹어보곤 한다. 외래를 찾아오는 암환자에게 용기를 줄 수 있었던 한마디 한마디는 학문에 몰두하여 수많은 시간을 투자한 노력의 소산이었다.
젊음을 바쳐 이룩한 남편의 심장내과 학문은 이제 두 쌍둥이 아들이 이어가고 있다. 삶의 전부를 심장환자와 후학들의 교육, 한국 심장학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남편은 전국 각처에 흩어져 있는 후학들을 지켜보며 흐뭇해한다. 그렇게 살아온 우리 부부 앞에 네 명의 자녀와 여덟 명의 손주들이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다.
오순도순 식구가 다 모이면 거실이 비좁을 정도
토요일마다 있는 가족모임의 음식 만드는 수고는
손주들 얼굴을 보는 순간 눈 녹듯 사라져
여름방학이라는 긴 휴가를 보내려고 미국에 사는 큰딸 선경이가 큰 사위를 남겨 둔 채 두 손녀를 데리고 한국에 왔다. 이번 여름 방학은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라고 큰딸은 즐거워했다. 중학교 1학년이 된 손녀는 두꺼운 영어 소설책을 끼고 다니며 지하철, 음식점 등 틈만 있으면 책을 읽는다. 그러나 한글은 읽지도 말하지도 못 한다.
어제는 두 손녀와 함께 한글 박물관을 방문했다. 소상히 한글에 관해 설명하시던 선생님은 뜻밖에 큰딸의 옛날 국어 과외선생님이 아니던가. 긴가민가 하던 딸이 알아보고 “선생님 혹시 국어 선생님 아니세요?” 하면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분 역시 너무나 반가워하였고 함께 사진을 찍고, 안부를 묻고 두 손녀에게 선물도 주면서 정성껏 한글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그분은 대구 여중 일 년 후배로 내가 무척 아끼던 후배이다. 딸은 당장 손녀들의 한글 학습을 부탁했다. 흔쾌히 수락해준 선생님께 감사하며 보통 인연이 아님을 새삼 느낀다. 손녀들은 반드시 한글을 깨우치고 가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열심히 배우고 있다.
1982년, 4명의 자녀를 시부모에게 맡기고 나는 덴마크로, 남편은 독일로 유학을 갔다. 그 후 우리 부부는 독일에서 다시 만나 프랑크푸르트 의과대학에서 근무했다. 공무원 신분인 나는 자녀를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큰딸 선경이는 예일 초등학교 2학년으로 부득이 담임 선생님께 잘 돌봐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방과 후에 큰딸을 학교에 남겨 책을 읽게 하였다. 책을 읽는 습관을 갖게 해준 덕분에 선경이는 그 후로도 일상을 책 속에서 살았다. 단박에 눈에 띄지는 않지만, 독서로 머릿속에서 축적된 양식과 지혜는 오늘날까지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그 덕분에 대학을 마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파슨스(Parsons) 디자인 학교에서 패션 마케팅을 전공하였다. 지금은 두 딸의 엄마로 당당히 일하는 커리어 우먼이 되었다.
사위도 이탈리아 로마대학에서 국제 경영학을 전공한 후 토리노 대학에서 자동차 디자인을 전공하였다. 지금은 뉴욕에서 딸과 같이 일하고 있다. 머나먼 타지에서 자기의 전공을 살려 개성을 발휘하고 즐기면서 사는 것 이 기특하다.
둘째 딸 정주는 효녀이다. 알토랑 같은 세 명의 자녀를 키우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낸다. 내가 독일에 있을 때 정주는 유치원생이었다. 엄마 손이 한창 필요할 때 도와주지 못한 것이 너무나 미안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어느 날 수업 중에 정주가 빗자루 들고 복도에서 혼자 청소를 했다. 담임은 꾸중도 하지 않았고 어머니도 없으니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단다. 귀국하여 함께 지낼 때 정주에게 과제물이 뭐냐고 물어도 모른다고만 하였다. 친구에게 물어서 숙제 내용을 알아내던 그때의 기억은 나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을 갖게 한다.
그러던 정주가 유아교육을 전공하여 자녀를 잘 키우고 있다. 미국에 어학연수 가서 만난 사위는 터프스(tufts) 치과대학을 나온 치과의사이다. 미국 치과의사 면허를 활용하여 한국에서 외국인까지 진료하고 있다. 딸과 사위는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얼마든지 저녁 식사를 편히 할 수 있다고 늘 넉넉한 마음을 열어 보인다.
쌍둥이 아들 성수, 성우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시부모님께서 온 힘을 다하여 키워 주셨다. 시어머님은 쌍둥이를 양손에 꼭 잡고 골목을 나가시며 누가 훔쳐 갈까 손을 놓을 수 없다고 하셨다.
쌍둥이를 키우면서 고생을 하였건만 즐거움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태어날 때 효자, 의과대학 들어갈 때 효자, 같은 날 장가가서 효자, 지금은 두 쌍둥이가 의과대학 심장내과 교수가 되어 효자인데 손자 손녀까지 안겨주는 효도를 하고 있다.
큰아들 성수는 소화기내과 전문의 하나와 결혼하였다. 하나는 두 손자를 키우며 나와 함께 김화내과를 같이 운영하는 원장이 되었으니 든든하기 그지없다. 둘째 성우는 내분비내과 전문의인 서영이와 결혼하였다. 서영이는 손녀 수지를 우리에게 안겨주고 명지병원에 근무하는데 학구적인 의료인이다.
오순도순 식구가 다 모이면 거실이 비좁을 정도이고 분주한 가족 모임이 토요일마다 이어진다. 주말에 음식을 만드는 수고는 손주들 얼굴을 보는 순간 눈 녹듯 사라지고 즐겁기만 하다.
쌍둥이 아들이 심장질환에 대해 학구적으로 흥미 있는 어려운 증례는 아버지에게 보고하고 토론도 한다. 딸과 며느리들은 손주들의 교육에 대해 열띤 논의를 한다. 나는 한발 뒤로 물러서 손주들의 교육은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고 맡겨둔다. 손주들이 무엇을 하든 잘하는 것이 있으면 상금을 걸어 의욕을 돋구어주고 격려한다. 여러 방면에 경쟁적으로 열심히 하는 손주들에게 용돈과 상금을 마련하느라 남편과 나는 일하는 보람을 느낀다.
큰 외손녀 진이는 내 첫 외손녀이다. 곧이어 미국에서 외손녀 에바가 태어났다. 그 후 진이 동생 혁이가 태어나 첫 손자를 안게 되었다.
진이는 세 살 때 갓 태어난 혁이의 뺨을 치면서 엄마를 뺏긴 심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6학년이 된 진이는 그 말이 믿기지 않는단다. 줄줄이 태어나고 있는 손주들에게 할아버지, 할머니는 사랑한다는 말과 손주마다 최고라는 표현 외에 더할 말이 없다. 때로는 특징을 말해 주면서 사랑을 표현한다.
진이는 첫 손녀라 최고, 혁이는 첫 손자라 최고지. 에바는 미국에서 태어난 첫 손녀로 국제적이야. 영준이는 첫 번째 친손자라 최고다. 수지는 첫 번째 친손녀라 ‘조대비’라고 별명까지 주면서 최고라고 한다. 큰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끼어있는 둘째 친손자 하준이는 할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은 손자라 멋지다고 칭찬하면 빙그레 웃으며 만족하는 표정이다.
정주의 막내이자 셋째 아들 준이는 너무나 귀엽다. 제왕절개로 태어났으나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삼성의료원 신생아 중환자실에 1개월 동안 입원했었다. 그런 탓인지 늘 안쓰럽고 걱정스러웠는데 이제 건강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 대견하기 그지없다. 준이는 외할머니 얼굴을 많이 닮았고, 두툼한 발은 외할아버지 닮았다고 꿰어 맞춰 칭찬해주면 함박웃음을 짓는다.
미국의 둘째 손녀 미나는 애교가 많다. 그러나 아토피가 심해 고생한다. 달걀, 우유, 견과류를 못 먹어 식사 때마다 신경이 쓰여서 VIP 대접을 받는다. 이번에 피부과 진료를 받으면서 체계적인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시대가 바뀌어 의료 분야도 4차 산업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 머지않아 AI 의사가 나타나 같이 진료할 날이 올 것이다. 젊은 세대를 걱정하기보다 미래의 주역인 신세대들을 믿어주고 격려해주어야 한다. 쌍둥이 교수의 새로운 프로젝트에 관해 설명을 들을 때마다 우리들 세대보다 발전된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의료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되풀이하기보다 미래를 향해 투자하면서 걸어 나가야 한다. 과거의 시점에서 치료한 환자를 현재 발전된 치료법에 맞추어 잘못되었다고 탓한다면 미래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언제쯤 편안한 마음으로 진료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뉴스를 대할지 알 수 없으나 이제는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