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시민공원이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대 동대문병원. 오래된 건물의 나무 바닥 교실에서 본과 4학년 강의는 환자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임상 실습은 실제 환자를 보며 회진을 하는 교수님의 설명과 함께 진행된다. 처음 흰 가운을 입은 나는 입원실을 돌며 환자의 상태와 교과서를 비교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무렵 국립의료원으로 잠시 임상 실습을 가게 되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했던 나는 서양식 병원시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학 교과서와 강의로 익혀왔던 희귀한 질병의 환자가 입원해 있기도 하고, 입원실마다 고혈압, 당뇨, 간경변증 환자들이 즐비하게 누워 있었다. 나는 마치 신기한 세상에 들어 온 느낌이었다.
6인 입원실은 조용하고 쾌적한 분위기였다. 면회시간은 엄격하여 보호자가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보호자가 없어도 환자는 잘 관리되고 있었다. 천사 같은 간호사는 친절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쳐 환자들이 규율을 잘 지킬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나는 이 병원의 최신 시설과 의사들이 진료하는 모습에 반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이 병원 의사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 병원에서 수련을 받으면 멋진 의사가 될 거야’ 하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인턴 시험을 치렀다.
국립의료원의 인턴 생활은 힘들고 지긋지긋한
의사 인생의 시작이 아니라 멋진 추억의 시간이었다
필기시험 후 면접시험을 보는데 아직도 우리 곁에서 동문회 고문으로 계시는 김종설 박사의 그 당시 질문이 생생하다. 승모판협착증 환자에서 청진시 들리는 잡음을 말해보라는 질문이었다. “Rumbling diastolic murmur입니다.” 내과 분야에서는 ‘족보’이다.
꿈은 이루어져 1971년 3월 국립의료원 인턴으로 의사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6.25 전쟁 후 1958년 스칸디나비안 3국(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이 650만 달러를 지원하여 설립한 이 병원은 전국에서 몰려오는 환자를 무료로 진료해 주는 특별한 병원이었다.
나를 내과 의사로 만든 곳은 이곳 국립의료원이다. 최첨단 시설이 갖추어졌고 전국에서 뽑힌 선배 의사들의 가르침이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과마다 아침 학술회의가 끝나면 영상 의학과로 가서 전날 검사한 영상 기록물에 대해 협진 회의를 한다.
이유 없이 환자에게 영상 검사를 하면 과장님은 꾸중을 하셨다. 반드시 ‘왜? 어떤 진단을 위해 검사를 하였는지?’라는 이유가 있어야 했다. 쓸데없는 검사를 하지 말고 정확한 진단을 위해 철저한 공부를 하라는 의미이다.
그 당시 짧은 아침 시간이었지만, 영상판독 훈련은 현재까지 진료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오늘날 모든 검사를 시행하여 물고기 낚듯이 질병을 찾아내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물론 의료사고로 의사들이 고발당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많은 경비를 감수하고라도 모든 검사를 해야 한다. 한편으로 방어 진료도 필요하다.
국립의료원의 인턴 생활은 힘들고 지긋지긋한 의사 인생의 시작이 아니라 멋진 추억의 시간이었다. 유능한 과장님들의 실력에 놀라고, 선배들의 따뜻한 배려와 양보, 협동심을 배웠다. 8시간 이상의 수술을 하면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인턴을 한쪽 구석 의자에서 잠시 휴식하게 하고, 마지막 피부 봉합에 동참시켜준 4년 차 선생님의 고마운 마음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국립 의료원은 ‘인레회’라는 모임이 있다. 인턴과 레지던트 모임이며 회장은 4년차 전공의 중에서 선출되는데 회의의 권한은 막강하다. 인턴, 레지던트의 문제점이 생기면 이 회의에서 논의하고 병원 행사의 계획에도 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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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의료원 인턴시절 목포 유달산 홍도해수욕장에서 / 맨 오른쪽이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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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되면 ‘인레회’ 주최로 파티가 열린다. 각 과장님과 의사, 직원이 다 모이며 음식 준비와 식당의 장식은 인턴 몫이다. 빨랫줄에 태극기와 스칸디나비아 국기를 매달아 장식하고 전등은 투명한 색종이로 감싸 은은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여자 인턴들이 카나페, 샌드위치, 샐러드 등을 만들면 근사한 뷔페 레스토랑이 되었다. 그날의 댄스파티를 위해 인턴 숙소에서는 틈만 나면 춤 공부가 한창이다. 나와 같이 인턴, 레지던트를 수련한 이향애 여자의사회 29대 회장과 여의사 동기들은 그때의 추억이 멋지고 아름다운 의사 인생을 만들었다고 지금도 되새기곤 한다. 돌이켜 보면 낭만과 향수를 간직한 인턴 수련이었다.
산부인과 수련을 하는 동안 인턴은 서투른 영어로 산모 앞에서 태아와 산모상태를 설명해야 한다. 참으로 진땀나는 순간이었다. 모든 의무기록과 타과 협진의뢰서도 영어로 기술해야 했다.
인턴 수련을 하는 동안 각 과를 돌면서 진단이 내려진 환자를 대상으로 의국에서 학술 발표를 했다. 모든 것을 종합하여 인턴 수련 평가를 하는 것이다. 다행히 나는 1등으로 졸업하여 무척 자랑스럽다. 미숙한 영어 실력을 극복하기 위해 의국 식구들과 같이 미8군에 근무하는 미국인과 영어회화 공부를 했다. 바쁜 일정을 틈타 공부한 것이 지금도 국제학회에 참석할 때 요긴하게 쓰인다.
우리나라 최초의 뷔페식당인 스칸디나비아 클럽이 있었다. 후배들은 진기한 음식을 맛볼 수 있었던 그때의 스칸디나비아 클럽을 얘기한다. 음식을 차려 놓고 먹을 만큼 갖다 먹는 방식은 너무나 생소한 방식이었다. 북구의 찬 음식, 더운 음식을 구분해 놓은 상차림에서 독특한 향기와 맛을 가진 훈제 연어는 인기 절정이었다.
스칸디나비아 클럽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제한되어 여기에 초대받아 들어가는 것을 행운으로 여겼다. 클럽에 갔다 왔다는 징표로 빵조각 몇 개를 들고 숙소에 와서 나눠 먹곤 했다. 그러나 국립의료원이 의료법인체로 바뀌면서 이 클럽은 경영상의 문제로 사라져버렸다. 뷔페식당 최초의 역사를 간직한 스칸디나비아 클럽과,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왕과 왕비의 사진이 있었던 아늑한 접견실을 그리워하는 많은 분들이 사라진 클럽에 대해 무척 아쉬워하고 있다.
2016년 6월, 메르스로 온 나라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메르스 환자가 연이어 발생하자 나라 전체가 메르스 불길에 휩싸였다. 대형 대학병원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국립중앙의료원은 전염병 발생 시 매뉴얼을 미리 준비하여 차분히 불길을 잡았고 과거의 명성을 되찾았다. 국가 위기상황에서 여전히 그 정신은 살아있고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병원으로 우뚝 선 것이다.
이제는 좀 더 투자하여 국가 중심병원으로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대형 대학병원과 비교해 보면 아직도 갈 길은 멀기만 하다.
나의 의사 생활 첫 보금자리인 국립 중앙의료원에서 내가 제18대 총동문회 회장이 되어 2018년 11월 17일에 60주년 기념행사를 한다. 감개무량하다. 평생 마음 깊이 새기고 있는 고마운 병원인 국립중앙의료원이 과거의 명성과 명예를 회복하여 국가 최고 중심 병원으로서 우뚝 서기를 간절히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