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애환을 담은 백혈병 (21화...

새하얀 눈이 쌓인 뉴욕 센트럴파크에 한 청년이 쓸쓸히 앉아있다. 영화 〈러브스토리〉의 여주인공인 제니를 애절하게 사랑했던 올리버이다.

이탈리아에서 이민 온 가난한 가정의 제니는 레드클리프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한 여성이다. 올리버는 미국의 명문 부호 배리트가문의 아들이자 하버드 대학에 다니는 멋진 청년이다. 두 사람은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을 올린다.

주변의 냉대에도 사랑과 행복을 얻지만, 올리버가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자 겨우 25세인 제니는 백혈병 선고를 받는다. 펑펑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커다란 눈송이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천진한 모습, 이렇게 순수한 사랑이 담긴 배경음악은 언제 들어도 우리를 그 시절로 돌아가게 만든다.

〈러브스토리〉는 지순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담백하게 그린, 우리 마음속에 사랑의 추억을 심어 준 작품이다. 그 당시 백혈병이 널리 알려지면서 백혈병은 불행을 갖고 오는 불치의 병으로 인식되었다.

백혈병은 ‘하얀 피’를 뜻하며 그리스어에서 유래
언니 결혼식에 가겠다며 외출을 허락해 달라고 조르던 은진이
절대로 안 된다고 하였지만, 결혼식만 보고 오겠다며 다녀와서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백혈병은 ‘하얀 피’를 뜻하며 그리스어에서 유래 되었다. 백혈구가 성숙하는 조혈 과정에서 바이러스 감염, 면역 기능의 장애 때문에 미성숙 된 백혈암 세포가 증식하여 골수 및 혈액에 침범하는 질환이다.

증상은 감기처럼 고열, 인후염, 피로감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증상이 자주 반복되고 상처나 수술 후에 출혈이 멈추지 않으며, 쉽게 멍이 들거나 반점이 생긴다. 잇몸이 붓거나 코피가 자주 나고 앞가슴 뼈에 압통이 있으면 의심을 해야 한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은 주로 성인에 많이 발병된다.

모든 백혈병의 치료목적은 혈액이 정상 세포 상을 보이며 고열, 빈혈 통증 등의 증상이 없어야 한다. 이러한 정상 상태를 지속해서 유지하는 것이 치료의 목표이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의 20~25%는 예후가 좋아 화학 약물요법으로 완치될 수 있지만, 재발을 막기 위해 지속적인 치료를 해야 한다. 약물 치료에 효과가 없으면 골수 이식을 해야 한다.

▲ SOS 어린이마을 진료 중에 (2012.)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은 소아에 많이 발병된다. 증상은 골수성 백혈병과 비슷하다. 특히 중추 신경계에 침범하므로 척추 수액 검사를 해야 한다. 이 백혈병 환자의 50~80%는 복합 화학 약물요법으로 잘 치료되며 지속적인 유지 약물 요법으로 관찰해야 한다. 이러한 치료에 실패하면 골수 이식을 해야 한다.

만성 골수성 백혈병은 골수에서 백혈구를 만드는데 장애가 생겨 무한정 백혈구가 증가하는 상태이다. 간과 비장이 커지며 비교적 천천히 진행된다. 항간에 문제가 되었던 글리벡은 특효약으로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으며 지속해서 복용을 해야 한다.

3년 이상 되면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진행되므로 만성시기에 골수 이식을 하면 70%는 치료가 된다. 골수 이식을 받은 환자는 면역학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거부반응이 오지 않게 지속적인 약물 복용과 정기적인 혈액 검사와 건강유지에 노력해야 한다.

입원실에서 고운 투피스를 입고 뱅글뱅글 돌면서 “선생님 나 예뻐요? 내일 우리 언니 결혼식에 가야 하는데… 갈 수 있죠?” 하며 잠시 외출을 허락해 달라고 조르던 은진이. 대학 입학을 앞두고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를 위해 입원한 상태였다. 절대로 안 된다고 하였지만, 결혼식만 보고 오겠다며 다녀와서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어느 가을날 쓸쓸한 표정의 현준이 어머니는 “한 달 전 하늘나라로 간 현준이 생각해서 이 난을 잘 키워 주세요.” 하고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눈물을 삼키면서 곱게 핀 난 화분을 놓고 갔다. 국립의료원을 그만두면서 나는 그 화분을 가슴에 안고 와 햇볕이 따사롭게 드는 대기실 창가에 놓았다. 그러나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다시 집으로 옮겨 햇살 가득한 거실에 두었다.

매일 들여다보며 정성을 들이고 물을 뿌렸지만, 도무지 꽃을 피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어느 봄날, 거실 가득 향기를 피우며 꽃망울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난 그때 현준이와 이별하던 순간이 떠올라 다시금 가슴이 아렸다.

자식이 먼저 죽으면 부모는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아름다운 이 세상을 즐기지도, 피어보지도 못한 나의 환자들은 부모의 애틋한 마음을 알고나 있는지.

해가 거듭할수록 나는 감정이 무디어지는 것 같다. 허탈한 마음을 안고 계속해서 혈액학을 해야 하는지 갈등한다. 백혈병을 주제로 하는 작품들은 죽음도 사랑으로 미화해서 감동을 주지만 내가 겪은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가난과의 전쟁, 자식을 보내야만 하는 부모의 찢어지는 마음을 지켜보면서 나도 같이 마음을 다스리고 냉정해져야 했다.

점차 나의 마음은 건조해지고 차가워지는 걸 느낀다. 정이 들면 이별을 해야 하는 아픔을 더는 견딜 수 없어 결국 난 떠나게 되었다. 혈액학을 그만두고 개원한 후 나는 이제, 더는 환자 앞에서 슬프거나 마음이 아프지 않지만 그때가 가끔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