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세포에 털 같은 것이 보이잖아!”
현미경을 보는 순간 나는 놀랐다.
슬라이드를 들고 검사실에 들락거리며 환자들의 검사 소견을 일일이 보고 임상소견과 함께 진단을 내리곤 했다. 그러나 이번 슬라이드는 처음 보는 세포 모양이라 몹시 흥분되고 당황하였다. 메틸렌 블루로 염색된 보랏빛 세포는 민들레 홀씨같이 흰색 털이 보송보송하여 날아갈 것만 같았다.
어떤 세포는 살짝 찌그러져 있고, 모양을 갖춘 세포는 해바라기 같기도 하다. 이렇게 고운 바탕에 연핑크의 동그란 적혈구는 구슬을 꿴 듯 무리를 이루기도 하고 군데군데 씨앗을 뿌려 놓은 듯한 혈소판은 공간을 채워 주기도 한다. 백혈구는 세포 구조가 다양하여 중성구, 림프구, 호산구, 단핵구로 세포 내 모양은 모자이크 같아 예술품처럼 보인다. 이러한 세포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주공간을 보는 듯하다.
혈액 검사가 비정상으로 나와 내과로 입원한 환자
세포화학적 검사 후 헤어리세포 백혈병으로 결론을 내려
비장수술 3일 후 말초혈액에서 망상세포는 10%로 줄고..
국립의료원 혈액내과에 30세의 해맑은 여성이 입원하였다. 환자의 상태는 좋았으나 입원 1년 전부터 잇몸 출혈이 자주 있었다. 6개월 전부터 달걀 크기의 덩어리가 좌측 상복부에서 만져졌으며 점점 커져 2개월 전부터는 좌측 복부 전체를 차지하였다.
이 환자는 수술을 위해 외과에 입원한 후 혈액 검사가 비정상으로 나와 내과로 입원하게 되었다. 좌측 상복부에 손바닥 크기의 비장이 만져졌으나 그 외 소견은 별 이상이 없었다. 빈혈이 약간 있었고 백혈구는 조금 증가 되었으며 혈소판은 정상보다 낮았다.
비정상적으로 털이 난 세포의 정체가 궁금하여 문헌을 찾아보니 ‘헤어리 세포’(이하 망상 세포)라고 하였다. 곧바로 골수 검사를 시행하였다. 전반적인 골수 세포상은 감소하였고 골수에도 망상 세포가 60%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자 현미경의 소견이 가장 중요하고 확진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대학병원 병리학교수를 찾아갔다. 말초 혈액과 골수에도 8~12㎛ 정도 크기의 망상 세포가 빼곡히 현미경 시야를 덮고 있었다. 수많은 세포질 돌기는 굴곡이 심하고 길고 불규칙하였다. 세포질 내에는 풍부한 미토 콘드리아, 골지 복합체, 공포, 라이보좀이 동반하고 있었다. 전자 현미경의 세계는 너무나 세밀하게 보여 신기하다 못해 황홀하다.
세포 화학적 검사를 위해 다른 대학 임상병리과 교수를 찾아갔다.
헤어리 세포가 골수성 아세포에서 발병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계통의 세포에서 태어난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몇 가지 검사를 더 해보니 음성으로 나와 골수성 세포는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어떤 검사는 양성 혹은 음성 모두 나왔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에 시약이 없어 할 수 없는 검사는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1923년 이왈드(Ewald)가 처음으로 급성 단핵구 백혈병이라는 이름으로 보고하고 1970년 프렌더라이츠(Plenderleith)가 헤어리세포 백혈병이라고 명명한 이 질환은, 현재는 백혈병성 망내증이라고도 부른다.
결국 이 환자는 헤어리세포 백혈병으로 결론을 내렸다. 먼저 비장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스테로이드 약물을 7일간 투여하였다. 좌측 상복부에서 촉지 되었던 손바닥 넓이의 비장이 세 손가락 넓이의 크기로 줄어들었다. 수술하여 확인 해보니 환자의 비장은 정상인보다 무려 10배나 커져있었다.
슬라이드에 비장 조직을 도장 찍듯이 눌러 현미경으로 보니 망상 세포가 비장 조직 전체를 덮고 있었고, 간 조직 역시 같은 세포가 빼곡히 보였다. 비장 수술 3일 후 놀랍게도 말초혈액에서 망상 세포는 10%로 줄었고 세포질 돌기는 사라져갔다. 수술 1개월 후 혈색소, 백혈구, 혈소판의 수치가 정상이 되어 환자는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하였다.
백혈병 환자를 만나면 두 가닥의 가느다란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를 연상한다. 종착역에 도달할 시점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슬픈 종착역을 말해야만 하는 의사이기에 나의 곁을 떠나는 환자는 갈수록 늘어만 간다. 그러나 이 환자는 나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었다. 수술하여 거의 완치할 수 있는 백혈병이기에.
나는 이 희귀한 백혈병을 진단하여 한국 최초로 혈액학회에 구연 발표하고 내과학회 잡지에 보고하였다.
헤어리 세포 백혈병 환자는 퇴원 후 7년이 지나, 개원을 한 나를 수소문하여 찾아왔다. 아주 건강하게 보였으며 결혼하여 두 딸의 엄마가 되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