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쿤에서 쉬다
뉴욕에 사는 딸네 식구와 함께 멕시코 칸쿤으로 휴가를 갔다. 긴장의 연속이었던 일상을 뒤로하고 잠시나마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칸쿤 공항을 빠져나오는 순간 대서양의 뜨거운 바람이 온 몸을 감쌌다. 새하얀 정장 차림의 잘 생긴 청년들은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행동으로 여행객을 안내했다.
태양은 하늘 높이 치솟아 흔들리는 야자수와 함께 남미의 정취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시내로 들어가니 나지막한 양철지붕에 낡고 빛바랜 간판을 달고 있는 구멍가게들이 보였다. 오밀조밀 몇 가지 물건을 팔고 있는 구멍가게들을 보니 옛날 우리네 신작로가 떠올랐다.
거리는 폐차해도 아깝지 않을 허름한 차들이 신나게 줄을 이어 달리고 있었지만 정열과 낭만으로 가득 찬 상상 속의 중남미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름다운 볼거리는 없었다. 한참을 달리니 드디어 신선한 돌문의 조형물이 무리를 지어 서 있고 깨끗하고 질서 있는 아파트와 새로이 단장되고 있는 거대한 쇼핑몰이 시선을 끌었다.
조영남, 도밍고, 나나 무스쿠리 등 많은 가수가 부른 〈제비〉가 생각나
고개를 끄덕이더니 모자를 벗고 엄숙한 표정으로 노래를 불러...
대서양을 향해 날리는 샷도 멋지지만 비단 같은 잔디는 융단을 밟는 느낌
호텔로 가는 길은 울창한 숲속을 달리고 있는 착각을 할 정도로 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위로 하늘은 탁 트여 있다. 도착한 곳은 ‘Be loved hotel(사랑받을 호텔)’이다. 입구에서 시원한 물수건과 샴페인 한잔을 권한다. 호텔 로비는 미색으로 장식되었고 거대한 예술품이 어우러져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나지막한 빌라 같은 건물 사이로 적당한 크기의 수영장들, 훈풍에 팔을 벌리고 여기저기서 춤을 추고 있는 야자수, 초가집을 연상케 하는 방갈로…. 여장을 풀려고 호텔 방에 들어가니 작은 아파트에 들어온 기분이다. 베란다에 나가보니 대서양을 바라보고 누울 수 있는 침상과 탁자가 있고 냉장고에 채워진 음료와 간식은 모두가 무료라 환호가 절로 나왔다.
허기를 달래려고 수영장이 있는 야외 식당을 찾으니 칵테일 바가 있었다. 수영하던 비키니 차림의 젊은이들이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 저마다 칵테일을 들고 남미의 정취를 즐기는 모습이 무척 한가로워 보였다. 방갈로의 침상에 자리를 잡았다. 대서양의 때 묻지 않은 공기와 오염되지 않은 햇빛을 받으며 마시는 짜릿한 모히또 칵테일 한 잔은 나를 천국으로 인도한다.
물거품을 매달고 쏜살같이 내빼는 수상 보트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수만 년 동안 무심한 파도가 만들어 낸 가루분 같은 모래는 발바닥을 간질인다. 내가 멋진 시인이라면 아니 글을 잘 쓸 수 있는 작가라면 이 아름다운 풍광을 좀 더 멋지게 묘사할 수도 있을 텐데… 하며 아쉬움을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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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칸쿤은 세계적인 휴양지다 [출처 ; 미국일상 길잡이 - 순대 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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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면 여기저기서 만찬이 벌어진다. 멕시코 민속의상 차림의 카우보이를 ‘차로(charro)’라고 한다. 챙이 큰 모자(솜브레로), 몸에 딱 붙는 조끼와 바지, 큰 나비넥타이, 줄줄이 붙은 은단추 장식과 가죽구두로 멋을 낸 차로 가수 그룹이, 무르익어가는 저녁시간을 열창으로 장식한다. 이날은 멕시코 독립 기념일이기 때문이란다.
드디어 우리 테이블에서 연주가 시작되었다. 조영남, 도밍고, 나나 무스쿠리 등 많은 가수가 즐겨 불렀던 〈제비〉가 생각나서 ‘제목이 뭐지?’ 하고 어물거리고 있는데 남편은 얼른 〈라 골론드리나〉라고 일러주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모자를 벗고 엄숙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른다. 갑자기 모두가 숙연해진다.
노래 내용이 궁금하여 수영장에서 사귄 멕시코 가족에게 물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생각했던 <제비〉의 가사와는 달리 뜻밖에도 할머니를 떠나보내며 부르는 슬픈 노래라고 한다.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때 부르기도 한다지만 즐겁고 흥겨워야 할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아 머쓱하였다.
이곳 칸쿤의 정기와 대서양의 바람을 함께 보듬어 설계했다는 플라야 무제레스 골프장은 그렉 노만이 설계했단다. 해안가의 골프장은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모습일지 꼭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대서양을 향해 날리는 샷도 멋지지만 비단 같은 잔디는 융단을 밟는 느낌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초록빛 잔디의 조화 속에서 황홀한 샷을 날린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인기척은 없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이 장면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 씨 그레이프라고 하는 나지막한 나무가 텐트를 치고, 이름 모를 잡풀들이 축축 늘어진 야자수와 어우러져 정글 같은 풍광을 만들고 있다. 이 넓은 골프장을 잠시나마 소유한 느낌이다. 새끼 악어는 여기저기서 꼬물꼬물 얼굴을 내밀다 인기척에 놀라 얼른 몸을 감춰 버린다.
남편과 점심을 하러 가는 길에 잔돈이 있느냐고 묻다가 언쟁이 벌어졌다. 1불, 2불 쓰다 보니 다 소진되었다. 난 방법이 없으니 그냥 팁 없이 먹고 오자고 하였다. 남편은 10불짜리를 주고 거슬러 받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였다. 난 펄쩍 뛰었다. 남편은 “그럼 불쌍한 사람 10불 다 주면 어때? 한국에서는 기부도 잘하면서” 하고 우긴다. 팁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는 옥신각신하다
야외식당에서 딸을 만났다. 결국 딸이 잔돈이 있다 하여 해결하였으나 식사를 할 때마다 낯설고, 부담되고, 혼란스럽다. 이곳의 웨이터는 아무리 여러 번 주문해도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서비스한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서비스가 좋으니 마음에서 우러나는 팁을 줄 수밖에 없다.
아니면 그 반대일까….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인 9월 22일이 결혼 40주년이라는 것을 비행기 안에서 알았다. 이번 여행은 사위와 딸의 초대로 이뤄진 것이다. 결혼기념을 위해 미리 계획한 여행이 아니었다. 비록 뒤늦게 알았지만 참으로 뜻 깊고 진정한 휴식을 할 수 있었던 즐거운 여행이었다. 함께 40년간 탈 없이 잘 살았다는 것에 대해 주위 모든 이들과 자식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