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제34대 대한의사협회라는 큰 단체에 대외협력이사로 합류하게 되었다. 당시 장동익 회장이 이끄는 협회는 야심찬 꿈을 품고 협회를 새로운 체제로 이끌기 위해 출발하였다.
상임이사들은 철저한 임무 수행과 남다른 각오를 다짐하였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장 회장은 어느 지역의 인사말에서 말실수를 하여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의협에 처음 들어온 나로서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의욕이 넘쳤고 잘 이끌어 보겠다고 다짐을 하였건만 참으로 안타까웠다.
서울시에서 개최하는 〈하이 서울 페스티벌〉 행사에 회장이 참석하여 인사말을 해야 했다. 불가피하게 김성덕 부회장이 회장 대행으로 참석하고 협회는 비상체제로 돌입하게 되었다. 의협 10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이영희 한복 패션쇼에 장동익 회장이 왕으로 출연하기로 돼 있었지만, 장 회장은 참석하지 못했다.
그 후, 보궐 선거로 제35대 주수호 회장이 당선되어 그동안 기획했던 학술대회 및 100주년 기념행사를 마무리했다. 특히 코엑스에서 열린 100주년 기념행사는 학술대회와 더불어 일반 국민을 위한 다양한 행사를 포함하여 장대하게 진행되었다.
제37대 노환규 회장의 집행부에 들어가게 되어
명예스러웠지만 책임과 부담이 어깨를 짓눌러
의협을 위해 몸 바치고 마음 바쳐야 한다고 다짐
비록 우리의 염원이었던 의사박물관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각 단체와 제약회사에서 보관하고 있던 의료의 역사와 유물들을 전시하여 관심을 모았다. 의사박물관을 위한 모금 활동의 일환으로 패션쇼와 바자회도 열었으나 실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언젠가는 의사박물관이 건립되기를 기원한다.
이때 타임캡슐 행사는 의협 100년 역사 책자와 여러 가지 의미 있는 물품과 기구들을 넣어 의협회관 앞마당에 타임캡슐 상자를 묻고 영구 보관하는 의식이었다. 하지만 이 행사가 일회성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서운함과 허탈함이 없었다는 말은 못할 것 같다.
젊은 의대생들은 음악회를 개최하였다. 팝송을 위주로 저마다 온 힘을 다해 연주하였다. 이 행사에 당시 최고 인기가수 인순이 씨를 초대하였다. 방청객은 점잖게 앉아 손뼉만 치며 호응하는 정도였다. 열창을 한 가수는 이렇게 관객도 적고 소극적인 반응은 처음이라 했지만 공부만 하는 우리들이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투르다는 사실을 모르고 한 말로 추측된다.
나는 장동익, 김성덕, 주수호 세 명의 의협 회장과 함께 일한 셈인데, 2012년에는 한국여자의사회 회장으로 의협 부회장의 직책을 맡아 제37대 노환규 회장의 집행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명예스러웠지만 책임과 부담이 어깨를 짓눌렀음에도 의협을 위해 몸 바치고 마음 바쳐야 한다고 재차 다짐하였다.
한국여자의사회 업무 외에 생활의 1순위는 의협 업무였다. 매주 수요일 오전 7시면 사계절 내내 방학도 없이 상임이사회는 열렸다. 회의 때마다 논쟁이 벌어지는가 하면 어떤 토론은 극도의 긴장감이 임원들의 마음을 휘감았다. 젊은 의사들에게 의료의 현실과 소통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여 새로운 인물로 부각된 노환규 회장은 의약 분업 때와 같이 의사들이 깃발을 다시 들게끔 하였다.
2012년 7월 1일부터 정부는 강제로 포괄진료비제도를 시행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의료계는 강제시행을 하면 응급 환자를 제외하고 7개 군의 수술에 대해 전면 7일간 수술 연기를 한다고 대응하였다. 언론은 연일 이 사실을 중점적으로 보도하며 제2의 의료 대란을 우려했다. 이때 모 국회의원이 의협을 전격적으로 방문했다.
이때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의 구조조정과 포괄진료비제도협의체를 만들어 개선해 달라는 의협의 요구를 수용했다. 의협이 이 협상을 믿은 덕분에 언론이 우려하던 의료 대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유증은 심각하였다. 의협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는 거칠고 냉소적이었던 것이다. 이에 입은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는 듯해 안타깝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명 ‘도가니법’이라 하여 아동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 선포되었다. 공교롭게도 모 산부인과 의사의 살인사건과 맞물려 의사들이 이 법률로 인해 직격탄을 맞게 되었다. 의료기관의 개설자는 소속된 의료인의 성범죄 사실에 대해 고용할 때마다 경찰서에 조회해야만 했다. 환자 진료를 위해 촉진을 하거나 청진을 할 때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게 되었다. 잘못하면 성추행범으로 고발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응급실에는 전문의가 당직을 서야한다는 법 일명 ‘응당법’도 생겼다.
그때까지는 전공의가 응급실에서 당직하며 환자를 보고 전문의의 진료가 필요하면 요청을 하면 됐다. 그러나 응당법으로 각 과 전문의가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온종일 환자 진료, 수술, 강의 등으로 고단한 전문의와 교수들이 야간 당직까지 책임져야 하는 비현실적인 법이라 관측하는 이들이 다수로 보인다. 법안은 국회의원 10인이 발의하면 가능하다.
또한 정부도 몇몇 절차와 과정을 거친 후 법안을 발의할 수 있다. 의사를 옥죄는 법안에 의협은 따라가기 바쁘다. 예측할 수 없는 법들이 탄생하면 의협은 공청회, 토론회, 각계 직역을 통한 위원회를 열어 소위 ‘악법’이라 여기는 것들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대처 방안을 세우지만, 언제나 역부족이다. 그렇기에 과거 의약분업 때도 의사들은 정부를 향해 저항하며 파업 투쟁, 궐기대회 등으로 온 나라에 관심을 호소했다. 하지만 의료 수장들이 구속되어 갇히고 마는 결과를 맞이했다.
2012년 9월 13일 서울역 광장에 의사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의료악법 철회를 외쳤다. 10월 7일에는 일산 킨텍스에 전국 의사들이 모여 정부와 전 국민을 향해 더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정부의 뜻대로 의료법은 시행되었다. 집행부는 엄동설한 꼭두새벽에 비상대책위원으로 긴급회의에 참석하는가 하면 때로는 영상회의를 하며 감옥에 갈 각오로 임했다.
의료계를 위해 최선을 다하였건만 노환규 회장은 2014년 4월 대의원회에서 탄핵되어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또다시 혼돈의 의협은 김경수 대행, 제38대 추무진 회장 체제로 들어갔다. 추무진 회장은 단식으로 투쟁을 이어가며 힘이 아닌, 소통과 타협으로 의료 악법들을 헤쳐 나가겠다고 다짐하며 애를 썼지만 애석하게도 많은 이들이 ‘악법’으로 여기는 법들은 계속 쏟아지고 있다.
정부는 또다시 ‘문재인 케어’를 선포했다. 마침 2018년 제40대 의협 회장으로 젊은 혈기의 최대집 회장이 당선되었다. 현실을 외면한 의료법을 만들어 공표하면 즉각 대응하기 위해 더 강력한 지도자를 원한 결과였다. 이번 집행부야말로 큰 숙제를 안고 첩첩산중을 걸어가야만 한다. 무사히 종착역에 도착하기를 기원해 본다.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새로운 ‘악법’의 저지를 위해 벌써 두 번의 궐기대회가 진행되었다. 언제쯤 편안한 마음으로 진료실을 지킬 수 있을까하며 의사들은 막막해 한다. 소신 진료를 할 수 있는 날은 언제쯤일지 그 끝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