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돈에 상관없이 좋은 약 주세요.”
진료실에 들어온 환자는 행여 값이 싸고 질이 낮은 약을줄까봐 미리 방어하기도 하고 또한 최고의 대우를 받는 것도 원한다. 과거에는 의료기술이 좋다고 미국으로 가서 진료와 수술을 받았지만 이제는 재미 교포도 한국에 와서 진료 받는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입니다. 미국에 비하면 한국은 의료 천국이지요. 모든 검사와 수술비용, 여행 경비까지 포함해도 미국에서 진료 받는 것보다 훨씬 비용이 저렴하니까요.”
이런 소리를 들을 때는 ‘그동안 의사들이 희생해서 이루어 놓은 좋은 의료 보험 제도이니까’ 하면서 자부심을 느낀다.
2000년, 강제 의약 분업으로 대한민국은 의료 대란을 겪어야 했다. 그 후 12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의료계는 요동치고 있다. 바로 의약분업과 비슷한 문제점을 가진 ‘포괄수가제’ 때문이다.
얼마 전 택시를 탔다. “아저씨, 포괄수가제를 아세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하게 하냐는 기사님의 질문에 이렇게 물어보았다. 예상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알지요. 그렇지만 사람이 물건입니까? 사람마다 병이 다른데 어떻게 똑같은 값을 내고 똑같은 수술을 합니까?” 기사님은 불만스럽게 대답했다. 곧 목적지에 도착하여 얘기를 더 듣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의술이 정형화되고 있다
진료와 치료행위마저 행정적 편의와 비용 절감만을 내세워
의사의 진료권을 박탈당하고 있다는 원성이 들리는 듯하다
일반 국민은 ‘의료정액제’라고 하니 물건에 대한 ‘정찰제’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값싸고 질 좋은 물건을 사듯 좋은 제도라고 여긴다. 대한민국 어느 병원을 가더라도 급성충수염, 치질, 제왕절개, 자궁적출, 편도절제, 백내장, 탈장에 관한 수술비용이 똑같다. 경력이 있는 의사의 수술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치료비가 마치 물건 값처럼 미리 매겨져 있다.
인체는 저마다 체질이 다르며 투약과 수술 후 반응도 저마다 다를 수 있다. 기존 질환이 있는 환자는 응급 수술을 받고 어떤 합병증이 발생할지도 예측할 수 없다. 제왕절개산모가 자궁수축이 안 되어 과다출혈이 발생할 수도 있다. 충수염수술 환자가 원한다고 해도 위내시경 혹은 추가 검사를 할 수 없다. 비용 절감의 차원에서 시행할 수 없다.
의술이 정형화되고 있다. 고정화될 수 없는 의사들에 의한 진료와 치료행위마저 행정적 편의와 비용 절감만을 내세운 정부가 좌지우지하려는 것 같다. 이에 의사의 진료권을 박탈당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사람들의 커져가는 원성이 들리는 듯하다.
포괄진료비제도를 시범 사업하는 대형병원에 현직 외과의사가 두 달간 파견 나가 일했다. 본래 수술 상태와 회복 경과를 보고 퇴원 날짜를 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포괄진료비에 해당하는 환자는 입원부터 퇴원까지의 전 과정이 미리 입력되어 있다. 상처의 흔적이 거의 없고 회복이 빠른 복강경수술은 비싼 장비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금지되고 있다.
수술실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일회용 수술 가운과 기구를 사용하는데 이런 물품을 소독해서 재활용하고 수술 가운도 세탁해서 다시 사용해야 한다. 수술 시 사용하는 소모품도 저비용의 제품을 사용해야 한다. 수술 후 장기 내 유착이나 장폐색을 예방하기 위해 유착 방지제를 사용해야 하지만 이것도 사용할 수 없다.
외과 의사는 두 달간 일한 후 포괄진료비제도는 의료비용 감소에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수술을 받는 환자 입장에서는 분명 피하고 싶은 제도일 거라고 말했다.
물론 비용절감진료가 불법은 아니다. 다만 의사로서 양심상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제도로 보인다. 합병증이 생길 가능성이 있는 환자, 기저질환이 있어 위험성이 있는 환자, 입원 기간이 길어질지도 모르는 환자는 모두 대학병원으로 보내야 한다. 규격에 맞출 수 있는 환자만 골라 수술해야 한다. 결국
환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치료받고 나서 분명한 회복 후에 퇴원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병원으로서는 정해진 비용 내에서 치료해야 하므로 더는 입원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합병증이 생겨 재입원하게 되면 비용 절감보다 치료비가 더 소요된다.
이렇게 제한된 진료비로 ‘국민 개인에게 맞는 수술을 시행할 수 있을까? 심각한 합병증이 생길 때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저수가 제도 하에 의사들은 과연 소신 진료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의사들은 고민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정부는 과잉진료를 억제하며 건강보험재정의 안정과 국민 의료비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렇다면 만일 한 생명이 이러한 제도에서 희생된다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의료를 하나의 상품처럼 생각하는 정부와 소신 진료를 외치는 의협과의 날선 대립은 쉽게 끝나지 않을 듯싶다.
의협은 국민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시행하여 포괄진료비제에 대한 정책을 결정하겠다고 하였다. 이 제도에 대해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국민의 51.1%가 찬성하였다. 그러나 개원 안과 의사회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른 결과는 92%가 시행 연기를 원했고, 각 병원을 방문한 일반 환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도 70.6%가 시행을 연기해야 한다고 응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포괄진료비제는 시행되고 말았다.
현재에도 악순환은 계속되고 있다. 매번 바뀌는 의협 집행부마다 의욕과 용기를 갖고 출발하지만, 임기도 채우기 전에 반대집단으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의료 복지는 의사의 희생만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국민들의 호응과 의료복지비용에 대한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어쩌면 의료보험료가 아닌 ‘의료복지세금’이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세계에서 가장 잘된 의료보험제도라 하여 각 나라에서 이 제도를 배우기 위해 연수를 온다. 하지만 그 배경에 의사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도 배워가는 지는 모르겠다. 이제라도 의사의 소신 진료를 위해 정부는 제도의 보완점을 찾아 해결해줘야 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우리사회 구성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모두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