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독일의 북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도시, 뮌스터에서 세계여자의사 학술대회가 열렸다. 지금도 그 도시를 생각하면 숲속의 신선한 향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수백 년을 지켜온 아름드리나무가 하늘을 뒤덮고 가지마다 싱싱한 푸른 잎은 계절을 알려주고 있었다.
숲 사이로 끝없이 펼쳐진 길은 우리나라 시골길을 연상케 한다. 이 학회에 참석한 한국여자의사회 회원 30여명은 몇 명씩 짝을 지어 이 길을 따라 걸었다. 좁다란 길옆에는 수북이 낙엽이 쌓여 푹신한 이불을 밟는 듯하였다. 넓은 잔디밭 공원에는 예쁜 패랭이꽃으로 ‘WELCOME’이라는 글자를 수놓았고 꼬마 토끼들은 무얼 찾는지 바쁘게 뛰어다녔다.
쌍쌍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젊은이들은 푸름 그 자체였다. 러닝셔츠 차림으로 힘차게 숨을 몰아쉬며 달리는 학생들은 내일의 희망과 건강의 상징처럼 보였다.
성차별 문제에 대해 각국 학생, 전공의와 함께 열띤 토론
한국 여의사들은 한복차림으로 사방에서 카메라 세례를
여자 의사들의 고민거리와 대안과 방향이 제시된 값진 학회
도시 한가운데 인공으로 만들어진 호수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수양버들 가지는 휘어져 물그림자를 만들고 희귀한 모양의 풀과 이름 모를 들꽃들이 호수를 에워싸고 있다.
호수 주위를 걷다 보면 호수가 뿜어내는 향기에 도취된다. 뽀얀 새벽에도 걷고 또 걸었다. 이곳 사람들은 푸른 숲속의 때 묻지 않은 공기를 마시고 자연을 벗 삼으니 축복받은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다. 호수 위에 유유히 떠 있는 요트를 바라보며 자연의 도시를 감상하는데 어느덧 붉은 노을과 함께 해가 저물고 있었다.
세계 각 나라 여의사들이 발표한 내용을 보면 나라마다의 질병과 사회적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젊은 여의사들의 출산, 육아, 남자 의사들의 성차별과 성희롱, 성폭행 등이 문제이다.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다른 나라도 우리들의 고민거리와 비슷하였다.
영 포럼에 참석한 한국의 전공의는 성차별 문제에 대해 각국 학생, 전공의와 함께 열띤 토론을 하였다. 나는 이번 학술대회에서 한국의 여자 의과대학생과 여 전공의에 관한 임신, 출산, 육아 문제에 대해 논문을 발표하였다.
1,209명의 여자 의대생과 1,223명의 여전공의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출산 휴가가 없어도 의대생은 25%, 전공의는 43%가 출산을 원했다. 3개월의 출산 휴가가 있다면, 의대생은 49%, 전공의는 57%가 출산을 원했다. 출산을 원하는 전공의들은 1명의 자녀만 원하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다.
의대생이 전공의가 되면서 출산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이지만, 수련기간 중의 출산, 육아의 어려움은 선배들의 경험을 통해 알기 때문에 1명만을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공의가 2명을 출산하면 출산 휴가 6개월의 공백이 생겨 전문의 응시 자격에 미달된다. 1년을 더 근무해야 자격을 얻어 시험을 칠 수 있다.
전문직 여성의 경우 출산 과정과 육아의 어려움이 겹쳐 출산율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이후 한국여자의사회의 건의로 2명을 출산할 때 전문의 시험을 볼 수 있으며, 3개월의 수련만 추가하면 전문의 자격을 인정하도록 건의하였고, 의학회 정관을 고쳐 시행하게 되었다.
특히 폭력 문제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에서 매 맞는 남성이 있다는 사실에 각국 여의사는 폭소를 터뜨렸다. 너무나도 비참한 성폭력에 의해 치료할 수 없을 지경의 상처를 입은 아프리카 여성의 사진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제 한국뿐 아니라 세계 여의사들은 가운을 입고 환자만 볼 것이 아니라 여성의 인권, 복지, 차별에 대해 좀 더 깊게 고민하고, 해결 방법을 모색해 나가야 할 때가 아닌가 싶었다.
아프리카에서는 150여 명의 여의사가 참석하였다. 주로 케냐, 나이지리아에서 많이 참석하였으며 일부 기업체는 여의사들이 독일 학회에 참석하는 여비까지 보조해 주었다고 한다. 이들은 영국의 지배하에 살았기 때문에 유창한 영어와 왁자지껄한 목소리로 학회장을 주름잡았다.
또한 흑갈색의 피부 빛과 조화를 이룬 원색의 옷차림이며 아프리카 여인들이 쓴 특유의 모자와 액세서리는 아프리카 여성사회를 보여주는 듯했다. 빨간색 바탕에 갖가지 원색 꽃무늬로 채색된 원피스를 입은 늘씬한 몸매의 여인은 모델 같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흑진주 같은 피부의 젊은 여의사는 왕방울만한 눈동자의 아기를 안고 갈라 디너쇼에 참석하였다. 특이한 모자를 쓰고 학회에 참석한 것을 보니 아프리카의 정서를 알 것 같다. 천경자 화백의 작품 〈미인도〉가 연상됐다.
30여 명의 한국 여의사들은 각양각색의 한복차림으로 사방에서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자세 취했다. 나라 밖으로 나오니 우리 한복이 참으로 단아하고 품격 있고 곱다는 것을 더 잘 알게 됐다. 색깔에 따라 분위기가 다르고 서양 드레스의 분위기를 가미한 개량한복, 머리에 비녀까지 꽂고 등장한 박 교수의 궁중 한복까지 선을 보여 더욱 찬사를 받았다. 기모노와 치파오는 도저히 우리 한복의 우아함을 따를 수가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독일 뮌스터에서 열린 이번 세계여자의사 학술대회는 자연 속에서 숨 쉬고 느낄 수 있었으며, 마음과 마음을 통하는 소통이 있었고, 각 나라 여의사들이 뿜어내는 멋을 만끽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오늘날 현 대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여자 의사들의 고민거리와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대안과 방향이 제시된 값진 학회라 할 수 있다.
2013년 8월, 한국에서 개최되는 세계여자의사 학술대회는 이화여자대학 캠퍼스에서 열릴 예정이다. 다음 학술대회에서는 어떠한 의제로 세계 여의사들에게 주목받을지 기대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