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을 잠시 생각해 본다.
이화여대 정문 앞 광장은 먼지가 풀풀 날리고 비가 오면 신발이 푹푹 빠지는 질퍽질퍽한 흙바닥이었다. 젖은 발로 요리조리 피해 다녀야만 했던 그 광장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반들반들한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다.
신촌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학교로 들어가는 좁은 길엔 눈요기할 것이 많았다. 다닥다닥 이어진 상점에는 여대생이 좋아 하는 입을 것, 먹을 것, 화장품이 진열되어 있고, 구두, 핸드백 수선 가게, 미팅 단골 장소인 숙녀다방, 허기를 달래며 군것질할 수 있는 빵집이 있었다. 외국 기자가 와서 대학가에 서점이 없다고 꼬집어 보도했던 기억도 있다.
나지막한 교문을 들어서면 웅장하게 버티고 있는 대강당은 지금도 그 위세가 당당하다. 1956년에 준공되어 2000년에 외관, 무대 공사 등이 완료되었는데 2,900개의 객석을 갖추고 있다. 수많은 계단을 올라야 도달할 수 있는 대강당에는 섬세하고 아름답게 설계된 창틀과 한 가운데 십자가가 있는데 마음을 안정시킨다.
세계여자의사학술대회가 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에서 열려
캠퍼스를 밟은 외국 여의사들은 연신 “wonderful!” 환성
화강암으로 꾸며진 외벽과 넓은 객석을 바라보면 이 건물이야말로 영원한 이화여자대학의 자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문에서 우측으로 한참을 걸어가면, 크나큰 운동장이 있다. 이곳에서 뙤약볕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업도 거절하면서 한일회담 반대집회를 했고, 해마다 5월의 향연과 메이퀸 대관식이 열렸다.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옛 추억이 돼 버렸다.
그 자리에 이화 복합단지가 자리 잡았다. 국제 초청 현상공모를 거쳐 선발된 세계적인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의 설계로 그 광장은 다시 태어났다. 기존의 광장과 운동장을 오묘하게 연결해 가운데는 물이 흐르는 계곡을 연상케 만들었고 양쪽으로는 생활과 학습을 할 수 있는 시설공간과 교육과 연주를 위한 극장·영화관·컨벤션 홀 등이 들어섰다.
옥상은 잔디밭 정원을 꾸며 쾌적하고 아름다운 그린 캠퍼스가 펼쳐져 있다. 이런 현대적 건축물과 대비되는 것이 있다. 바로 1935년에 완공되어 문화재로 등록된 석조 고딕 건축물인 본관, 중강당이다. 엄숙함을 느끼게 하는 옛날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제 여자대학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캠퍼스를 자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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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화여대 의대 시절, 대학 캠퍼스에서 / 앞줄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필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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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31일부터 8월 3일까지 ‘여의사의 힘으로 세계인의 건강을’이라는 표어를 걸고 제29차 세계여자의사학술대회가 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에서 막을 올렸다. 이번 학술대회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39개국에서 1,374명이 참석했다.
조직위원회는 2년 동안 이 대회를 위해 13개 분과위원회로 세분화하여 가동되었다. 재정분과위원장을 맡게 된 나는 조직위원회가 탄생하는 날부터 ‘재정’이라는 단어와 함께 ‘흑자’를 내야 한다는 살림살이 걱정에 마음이 무거웠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속담을 상기하며 120명의 조직위원과 임원들은 재정 후원을 위해 설득을 시작하고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었다.
박경아 세계여자의사회장은 그 위력이 대단하였다. 세계 여의사를 아우르는 힘을 발휘하고 비용 창출에 큰 힘을 발휘하였다. 김봉옥 조직위원장과 김숙희 사무총장 역시 감추어진 능력과 리더십으로 성공을 창출시켰다. 이길여 고문은 이번 국제학회에 1억을 후원하셨다.
한국여자의사회의 상임이사와 이사들, 재정분과 위원, 각 대학 여자 교수들 모두가 모금을 위해 일조를 하였다. 자진 후원, 한국여자의사회를 무한히 아끼는 선·후배들의 협조, 각 협회 단체들의 지원, 부스를 설치해준 제약업계, 의과대학 여자 교수들과 여 전공의, 의대 여학생까지도 적극적인 참여와 봉사로 힘을 보탰다. 그야말로 이번 행사는 모든 분의 합작품이었다.
과거 다른 나라에서 열렸던 학술대회와 차별화하여 영원히 ‘코리아 최고’라는 인식을 심어주고자 누구도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화여자대학 캠퍼스를 밟은 외국 여의사들은 연신 “wonderful!” 하고 환성을 터뜨리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3년간 적금을 부어 142명이 참석한 나이지리아 여의사들은 한국의 문화에 더 열광하는 듯했다. 부스 전시장에서는 궁중 활옷을 입고 연출하는 코너가 마련되어 까만 얼굴, 파란 눈의 왕비가 계속 탄생하고 있었다.
행사 전야제가 국회의장 공관에서 열렸는데, 이날의 환호성은 전야제의 영향도 있었던 것같다. 한국전통음식에 인간문화재의 예술 공연으로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사물놀이와 순백의 한복을 걸치고 민족의 한을 묘사한 듯 은은한 춤사위도 펼쳐졌다. 그동안 흔하게 보았던 전통춤과는 또 다른 색다른 맛을 느꼈으리라.
갈라 디너쇼는 ‘한복 패션쇼’를 주제로 삼았다. 어느 나라도 흉내 낼 수 없는 한복의 옷차림마다, 이야기가 있고 사연이 있었다. 세계 각 나라 국기를 새겨 넣은 궁중 활옷이 등장할 때는 w“onderful! beautiful!” 환호로 관람석 분위기는 최고조였다. 한국드라마 〈대장금〉 〈해를 품은 달〉 등 인기 드라마에서 등장한 한복들이 모두 등장했다. 독특한 한복디자인에 관람객 모두가 찬사를 보냈다. 더욱이 이날 출연한 모델이 모두 의대 여학생과 전공의여서 더욱 감탄을 자아냈다.
2부에서는 나라별 패션쇼가 즉흥적으로 열렸다. 노래만 나오면 절로 흔들거리는 외국인들. 수십 갈래로 땋은 머리 모양, 진갈색의 피부에 원색 원피스는 이제 익숙한 아프리카의 상징이 되었다. 나라마다 무언가 보여주려고 애를 썼다. 호텔 로비에서는 한국 장신구, 옷, 가방 등을 진열하여 판매대를 만들었다. 비록 진품은 아니지만, 대통령이 즐기는 목걸이, 브로치라고 하니 불티나게 팔려 순식간에 동이 나버렸다.
이번 행사에는 한국 여의사들의 예술적 재능을 엿볼 수 있는 전시회도 열렸다. 동양화·유화·사진·민화 등 총 65점이 전시됐으며 1,000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세계여의사들이 참여한 ‘예술작품 전시회’는 예능학술대회였다. 동양화가이자 서예가인 박영옥 선생님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회원 한 분 한 분에게 재능기부를 했다. 서로 간에 사인한 부채에 난초 묵화를 그려주었다.
전시장 한편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들고 온 바자 물품들이 공개돼 선물들을 고르느라 북새통을 이루었다. 학술분과에서는 밤을 지새우며 주제 선정에 공을 들인 덕에 기조연설, 특강, 포스트 발표, 110개의 학술 주제 발표가 있었다.
폐회식은 한국여의사가 세계를 품는 순간이었다. 박경아 세계여자의사회장의 취임식을 겸했기 때문이다. 신현영 회원도 젊은세계여자의사회(YMWIA) 회장에 당선돼 세계여자의사회의 미래를 일궈가게 됐다. 제30차 세계여자의사학술대회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리게 된다. 예술의 도시, 음악의 도시를 전면에 내세워 홍보할 것이 예상된다.
조직위원으로서 이번 행사보다 인상적이면 어찌하나 살짝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세계여의사들이 진심으로 환호하고 기뻐한 이번 학술대회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 되어 펼친 훌륭한 오케스트라 공연으로 한국의 멋을 영원히 기억하게 만든 게 분명하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