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사의 외도 (47화)

내 진료실 벽에는 보랏빛 드레스 차림에 짙은 립스틱을 바르고 활짝 웃는 여인의 사진이 걸려 있다. 이 사진을 본 환자들에게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원장님 맞죠?” “원장님! 오페라 가수 하셨어요?”

내가 언제까지 진료할 수 있을까?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 그 사진을 바라보면 정신이 든다. ‘나도 저렇게 싱싱할 때가 있었어.’ 가끔 변신을 시도하여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활력소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일상의 묘약이다.

2006년 대한의사협회 정책 이사를 맡으며 의사협회 100주년 행사의 한 조각을 맡아 의협의 색깔을 바꾸고자 노력하였다. 의협 박물관 건립을 위한 기금 마련을 목표로 나는 한국여자의사회를 등에 업고 패션쇼를 하게 되었다. 학술 대회는 물론이고 여러 행사를 나누어 진행했다.

한국여자의사회의 회원들은 의협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평생 생각도 못한 낯선 무대에 올랐다. 여의사들은 모델이 되기 위해 잠시 ‘바람’이 났다.

정책이사를 맡아 의협100주년 행사의 한 조각을 맡아

의협 박물관 건립기금 마련을 목표로 패션쇼 개최

여의사들은 모델이 되기 위해 잠시 ‘바람’이 났다...

첫 번째 행사는 2006년 양장 패션쇼로 박경아 회장이 이끄는 ‘한국의사 100주년 맞이 및 한국여자의사회 50주년 기념 패션쇼’를 무대 위에 올려 큰 찬사를 받았다. 두 번째 행사는 2008년 의협 박물관 건립을 위한 기금 마련 및 의협 100주년 행사를 위한 한복 패션쇼이다. 복장에 따라 걸음걸이, 무대화장, 표정까지 연습을 하고 이야기가 있는 무대를 만들었다. 여의사들의 숨겨둔 끼를 유감없이 발휘한 무대였다.

그 과정이 우리를 단합시키고 낯선 세계를 경험하는 멋진 추억이 되었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걱정을 하였다. 의료계 인사들 한 분 한 분을 설득시키면서 100년의 의협 행사에 ‘동참해 주십사’하는 정성이 결국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 당시 의무사령관인 김록권 장군(직전 의협 상근 부회장)께 모델 출연 제안을 하자 흔쾌히 답을 주셨다. 무관 한복을 입은 왕의 역할이다. 본업이 장군인지라 특별한 연습 없이도 근엄한 표정과 걸음걸이로 무대를 장악하였다. 왕비 분장을 한 나는 비녀를 찌르고 족두리를 쓰고 한 걸음 뒤에서 따라가며 행여 치마를 밟을까 무척 긴장하였다.

이길여 총장님의 여왕 등극, 주위의 시녀들, 무수리였어도 즐거웠다고 김숙희 회장은 회상한다. 이향애 회장과 함께 춤을 춘 선생님들은 조선시대 기녀들의 춤사위를 묘사한 날렵한 몸놀림과 표정으로 관객들의 큰 환호를 받았다. 문영목 회장 부부의 정겹고 따뜻한 양반 외출, 경만호 회장과 남자 의사들의 독특한 한복 패션도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각계각층 인사들께 초청장을 돌리고 행사의 목적을 알린 이번 행사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80여 명의 모델이 온 힘을 다하여 만든 무대는 의협100주년을 빛냈으며 각자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으리라. 나 또한 잊을 수 없는 보람된 장면을 얻을 수 있었다. 이 행사의 기금은 현재 한국의사100년 기념재단의 씨앗이 되었다. 재단 창립 10주년 기념식에서 고인이 되신 이영희 선생님과 함께 감사패를 받아 그 의미가 새롭게 느껴진다.

▲ 무관 한복을 입은 왕의 역할을 김록권 장군과 왕비 분장을 한 필자

또 하나는 ‘범국민 손 씻기 운동’ 행사였다. 요즘은 가는 곳마다 세면대에 손 세제, 휴지와 드라이어가 비치되어 있다. 손 씻는 방법과 순서를 그림으로, 영상으로, 실제 실습까지 하면서 시작하였다. 아침 TV에 출연하여 각종 전염병은 손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내용과 실제 손 씻기 전 형광 사진과 씻은 후 사진을 비교하여 손의 지저분함을 보여 주면서 홍보하였다.

지하철과 버스에 홍보물 부착, 초등학교와 각 단체모임에 참여하여 손 씻기 실습을 하여 온 국민을 향한 손 씻기 문화를 위한 신호탄을 쏜 것이다. 그 결과 손 씻기는 일상 습관이 되었다.

의협 100주년 행사에 빠질 수 없는 것은 국민을 위한 봉사이다. 때마침 서울시에서 〈하이 서울 페스티벌〉을 주제로 갖가지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정책이사의 업무는 의료 봉사를 위한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다. 노들섬에서 열린 〈하이 서울 페스티벌〉의 의료행사는 소위 ‘대박’이었다. 자발적인 참여로 여의사회와 서울시의사회, 각 구에서 지원한 30여 명의 의사 선생님들이 1,000여 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노들섬 벌판에 5개의 텐트를 치고 간이 진료실을 만들었다. 이동식 영상촬영 검진 차를 동원하고 간단한 임상 검진을 위해 혈액을 채취하였다. 즉석 당뇨 검사를 하면서 식이요법과 칼로리 계산을 해 주고 일상생활 습관을 교육했다. 한 분 한 분의 건강 상담을 진행하며 약을 공급하는 맞춤 건강상담과 예방을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결과는 의외로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가슴이 뿌듯하고 무언가 한 것 같은 보람을 느꼈다. 조종남 선생님과 함께 진료 한 산부인과 선생님은 불편한 시설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궁암 검사를 시행하여 3명의 환자는 경부암이 확진되어 수술하게 하였다.

정책 이사를 하는 동안 또 하나의 굵은 나무를 심었다. 14개 보건 의약 단체 사회 공헌 협의회(이하 사공협)를 탄생시킨 것이 내 마음속 가장 큰 하이라이트이다. 그 당시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은 주사위를 던졌다. 아무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 탄생시켜 각 협회 간의 정책적인 대립으로 언쟁을 하지 말고 봉사하는 단체로 구심점을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의사 협회를 중심으로 각 의약 단체에서 모인 중앙위원들과 수차례 회의를 하여 14개 보건의약단체 사회공헌협의회를 탄생시켰다. 각 단체 간에 의견 충돌과 이견이 있어도 봉사하는 순간은 협회장이 만나 악수하면서 즐겁게 봉사에 참여한다.

의협이 이 단체의 중심에 서서 모든 업무를 맡아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예산, 인력, 조직도 없는 상태에서 조직을 만들고 회칙과 예산을 짜면서 한 걸음씩 발전하는 과정은 의약계 단체의 협력과 봉사 정신이 있기에 가능했다. 마음만 있으면 무에서 유를 창출할 수 있고, 인내를 갖고 마음을 모아 이끌어 나가면 해결책이 보인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지금은 해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도 나가 봉사한다. 사공협은 복지센터의 장애인, 독거노인, 오갈 데 없는 부랑인, 소외된 어린이, 장애인 등 이들이 기거하고 있는 40여 개 이상의 복지시설에 의료봉사, 노력 봉사, 물질적 기부 봉사를 한다. 사회 공헌 협의회라는 나무가 튼튼하게 잘 자라고 있다.

2018년, 어느덧 12주년을 맞이하였다. 각 시설은 공적인 도움만으론 부족한 부분을 사공협이 채워주었다며 각별히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이 사업을 통해 기부문화를 배우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인이 되신 친정어머니가 늘 나에게 ‘베풀고 살아라.’ 하시던 말씀을 조금은 실천하고 있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