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3일 금요일 점심, 서울 김화내과의원 근처 식당을 찾았습니다. 김화내과의원의 대표원장이신 7기 김화숙 선배님을 뵙기 위해서였는데요. 오랜 시간 대한민국 여성 의료인을 대표하여 궂은 역할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선배님의 가슴 벅찬 이야기들을 회원님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어린 시절 대구에서 공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대구에서 공부했습니다.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약목이었어요. 의사이셨던 아버님이 3살 때 심장마비로 돌아가셨고, 어머님 혼자서 언니, 오빠, 저까지 삼 남매를 키우셨죠. 그 시절 여자 홀로 생활전선에 뛰어든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소설 속 주인공처럼 밤낮없이 뛰시던 어머님의 모습을 보며, 여자라도 직업을 가지고 당당하게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어린 마음에 들었어요.
어머님이 생업에 종사하실 수밖에 없어 학교에 잘 보일 일이 없으니, 남몰래 억울한 눈물을 흘려야 했던 일들도 있었습니다. 실력으로는 1등인데, 우리 어머니께 2등으로 양해를 구했던 학교 측의 조치를 이해해 주셨던 일이 생각납니다. 1등이 아닌 2등인 덕분에 대구여중에 입학하여 대구여중 전교 1등으로 학원장학생에 선발되는 행운을 얻었지요.
중학생 시절 학원장학생에 지원하셨던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던 오빠가 조선일보에서 학원장학생 모집 공고를 잘라 편지에 넣어 보내왔어요. 그 쪽지를 담임 선생님께 드렸더니 교장 선생님과 의논하신 후 바로 추천서를 써 주셔서 지원했죠. 서류 심사에 통과한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서울 신문로에 모였는데 공교롭게도 시험 전날 밤 여관에 불이 났습니다. 다들 자다가 깜짝 놀라 뛰쳐나왔죠. 그때 벌렁거렸던 가슴이 아직도 뇌리에 깊이 남아있어요.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서울 올라오기 전날 친구 집에서 함께 풀었던 문제집에서 선발 시험에 일부가 나와 거침없이 풀어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학원장학생으로 공부하라는 운명인지도 모르겠네요. (웃음)
열심히 노력하고 갈망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도와주는 행운도 따르나봐요. (웃음)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가지셨던 건가요?
돌아가신 아버님도 의사이셨고, 큰아버님 세분이 의사이신지라 늘 의사에 대한 인식이 머리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큰 올케가 가운을 걸치고 환자를 대하는 모습은 어찌나 멋있게 보였는지 몰라요. 아파서 엄마 등에 업혀 가면 "아가씨, 주사 한 대 맞으면 금방 나을 거예요." 달래주곤 하셨죠. (웃음) 주변에 의사가 많았던 영향인지는 몰라도,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장래 희망은 늘 의사였어요.
의대 진학을 앞두고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서울대나 연세대를 가고 싶었지만, 실패하면 재수할 형편도 아니고 학원 장학생도 혜택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아 한 번에 자신 있게 합격할 수 있는 이대 의대를 선택하게 되었죠. 가정교사를 하면서 힘든 의대 공부를 하려니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의학 영문 원서 책값이 너무나 비싸 틈틈이 친구 책 빌려보고 오빠 후배가 쓰던 구판 해부학 책을 얻어 공부했지요. 유급하지 않고 졸업한 것만 해도 다행이며 등록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마음은 넉넉하고 자신 만만 했는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셨을 때는 만감이 교차하셨을 것 같아요. 이후에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의대를 졸업하고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인턴과 내과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혈액종양내과 staff으로 일했습니다. 당시 국립중앙의료원은 스칸디나비아 3국의 의료진들이 구축해 놓은 최신 시설과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고 최고의 의료진들로 구성되어 국내 최고의 병원으로 알려져 있어 전국에서 많은 환자들이 진료하러 왔습니다. 사실 인턴을 마치고는 미국으로 유학 갈 생각이었는데 지금의 남편이 세브란스에서 전공의로 남아 미국 가는 걸 적극 반대하는 바람에 인생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웃음) 당시 서울의 5개 의과대학 클럽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남편과는 의대생 시절부터 스터디클럽 활동으로 더욱 친해져서 정이 들었지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같이 활동했으니 꽤 오랜 시간 동안 알고 지내다 결혼하게 되었어요. 레지던트 2년 차에 결혼해서 딸 둘에 쌍둥이 아들 둘까지 4명의 아이를 키우며 워킹맘으로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물론 시댁부모님과 친정어머님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지요.
그러던 중 1982년에는 덴마크로 유학가게 되었어요. 혈액종양 분야를 더 깊게 공부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 이를 통해 더 많은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사명감도 있었거든요. 처음에는 자신만만하게 덴마크로 향했는데 3개월 정도 지나니 한국에 두고 온 아이들과 남편 생각에 너무 외롭고 향수병에 젖어 많이 힘들었어요.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목소리 듣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니 전화기 붙들고 눈물 흘리다 몇 마디 못하고 전화 끊는 날이 많았어요. 때마침 남편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의과대학 심장내과에 교환교수로 오게 되어 저의 덴마크 Lausen 교수께 양해를 구하고 독일로 자리를 옮겨 1년 동안 암센터에서 종양표지인자(S-Ferritin)에 대한 연구를 하고 논문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혈액종양 분야의 전문가로서 국립중앙의료원에서 하고 싶은 일들도 많으셨을 것 같은데 개원을 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수많은 혈액암과 종양환자를 진료하면서 죽음 앞의 환자에게 의사는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고 생명을 구하는데 무력함을 느꼈습니다. 한계를 느낀 저 자신은 점점 우울증에 빠지는 듯하며 탈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 명의 자녀들이 갈수록 교육비가 만만치 않게 들어가고 남편과 함께 공직에 근무하지 말고 한 명은 개원을 하라는 주위의 권고도 있었습니다. 결국 나 자신의 정신적인 문제와 경제적인 문제로 개원하게 되었지요. 사직서를 제출하고 '김화의원'을 개원한 이후에도 6개월 정도는 의료원 소속으로 양 병원에서 진료하였지요.
병원 이름에 대한 사연도 있으실 것 같아요. ‘김화의원’이라고 지으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공무원 신분으로 개원은 허용되지 않지요. 김화숙 이름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하여 김화의원으로 가다가 말았어요. '김숙의원'보다는 '김화의원'이 나은 것 같아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웃음) 개원한 뒤에는 공직 생활 때의 연구와 교육 부분 대신 대외활동에 많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여자의사회 회장, 대한의사협회 부회장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왔는데, 특히 보건의약단체 사회공헌협의회를 창립하여 16년째 꾸준한 의료봉사 및 일반봉사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게 개인적으로는 가장 자랑스러운 부분이네요.
선배님뿐만 아니라 가족 분들 중에도 의사가 많다고 들었어요.
저희 부부와 쌍둥이 아들 부부도 내과 의사인지라 6명이 내과 의사, 게다가 작은 사위는 치과의사이다 보니 의사 가족인 셈이죠. 가족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학술 컨퍼런스에 참여하고 있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아요. 두 아들은 대학에서 심장내과 교수로 아버지와 같은 분야 인지라 어려운 환자들의 시술 내용을 보고하기도 하고 합병증이 있는 어려운 환자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도 하지요. 큰 며느리는 소화기내과 전문의로 김화내과에서 나와 같이 근무하고 작은 며느리는 대학에서 내분비내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어요. (웃음) 이런 게 가족 모두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는 즐거움인지도 모르겠네요.
마지막으로 장학생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학원밀알장학회가 험한 세상에 피어난 예쁜 장미꽃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해요. 장학생 한명 한명이 지닌 각자의 아름다움이 모여 독특한 향기를 뿜어내거든요. 제가 지금까지 다양한 조직에서 활동해왔지만, 우리 장학회만큼 훌륭한 사람들이 끈끈하게 모여 있는 조직이 또 없어요. 여러분 모두가 각 분야에서 일등이 되는 일군이 되어 대한민국, 나아가 세계를 향해 뛰는 인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또한 우리 밀알들이 각 분야에서 사회를 위해 헌신하고 일조할 수 있는 훌륭한 밀알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및 편집 / 김상열(11), 김진아(30), 남정용(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