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식장에 담긴 추억들
남들에겐 하찮게 보이는 물건도 나에겐 보물일 수 있다. 그 보물을 위해 투자한 시간과 정성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삶 속에서 때로 지치고 힘들 때 우리는 자신만의 돌파구를 찾아 위안을 받으려한다. 여행은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마음의 공허함을 신선함으로 채우는 좋은 수단이다. 미지의 세계에서 구매하는 낯선 물건들이 부적처럼 마음을 달래는 효과를 주기도 한다.
거실 한쪽의 장식장에는 오밀조밀하게 일관성이 없는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세월은 흘렀지만, 시간의 흐름을 잊은 듯 아주 작은 것 하나도 모양과 색깔이 변치 않고 기억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여행지에서 소금 박물관, 빵 박물관, 카메오 박물관, 보석 박물관 등 생소한 박물관을 가보면 신기한 문화를 접할 수 있다. 그때마다 머릿속에는 온통 이들 문화를 한국으로 갖고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1983년 덴마크와 독일에 머무는 동안 나의 시야를 넓혀 준 것은 이들의 생활문화와 역사 속에 살아있는 예술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안 되는 1983년의 유럽, 땅덩어리와 자연환경, 예술, 문화, 모든 것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경이로웠다.
로젠탈은 중간 크기 접시 위 코발트색 바탕에 금박의 무늬로 접시 둘레를 치장
2번 접시는 15세의 알라딘이 동네 소년들과 어울려 놀이를 즐기는 풍경이다.
터번으로 머리를 두른 동자의 짓궂은 표정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모습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된 건축물, 전문성을 넘어 극히 세분된 역사가 있는 문화재, 지역마다 특색 있는 박물관, 계절마다 열리는 축제, 이 모든 것은 나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였다. 후세들의 일상이 된 역사가 마디마디마다 수놓은 것들은 후세들이 살아가는 자원이 되었다. 수많은 관광객이 유럽을 방문하고 지방 고유의 문화유산을 관람하며 돈을 썼다.
나는 본 빈블라드(Bjorn Winblad)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특히 그의 도자기 작품은 작은 것 하나에도 이야기가 있고 의미가 있다. 1918년 코펜하겐에서 태어나 코펜하겐 로열 예술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다재다능하여 즉석에서 단숨에 그림을 그리는 삽화가로 시작하여 유리공예, 섬유 디자인, 가구 디자인까지 섭렵한 특별한 재능을 가진 화가이다.
그는 필립 로젠탈(Phillip Rosenthal) 도자기 회사와 손을 잡으며 도예작가로 이름을 날린다. 혈액 종양학 연구원으로 덴마크에 체류 중에 가장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빈블라드(B. Winblad)의 작품들이다.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찻잔과 접시 등 도자기부터 최상의 정교한 예술품까지 진열된 전시장에서 나는 발을 뗄 수가 없었다. 환상적이고 매혹적인 원터치 선율의 방식으로 접근한 작품은 이야기가 있고 내 나름대로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비싼 작품은 살 수가 없었다. 꽃송이를 들고 수줍음이 가득한 아가씨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순수한 총각의 모습이 담긴 작은 작품을 구입했다. 며칠 동안 나의 마음속에는 그의 멋진 작품들이 아른거렸다. 다시 방문하여 나의 형편에는 과했지만 〈Komedie with Skove>이라는 작품을 골라잡았다. 마을의 모든 사람이 축하하는 결혼식장의 사랑스런 정경이다.
접시의 오목한 중심부에는 주례와 신랑 신부가 꽃을 들고 있고 상단의 우거진 나뭇가지에는 조롱조롱 축하 풍선이 매달려 있고 텐트도 쳐 있다. 접시 하단에 마을 사람과 아기들까지 옹기종기 모여앉아 축하를 보내며 환호하는 장면이다. 마치 우리나라 시골의 잔치 분위기를 연상케 한다. 어쩌면 이렇게 큼직한 접시에 한 순간의 행사 모습을 세심하게 표정까지 감정을 넣어 만들었는지 그저 감탄할 뿐이다.
로젠탈 스튜디오 라인으로 빈블라드의 작품인 〈알라딘과 요술 램프시리즈〉는 나중에 독일에서 구매했다. 총 12개의 시리즈 접시로 되어 있지만, 상점에는 3개 밖에 없었다. 2번, 9번, 12번이다.
알라딘은 아랍 소년으로 어머니와 함께 산다. 아프리카에서 마그레브인(모로코인) 마술사는 마법의 램프를 찾으러 왔다. 그는 비밀의 장소에서 램프를 꺼낼 수 있는 체구 작은 알라딘을 유인한다. 만일에 대비하여 알라딘은 마술사의 반지를 받아 램프가 숨겨진 동굴로 간다. 알라딘은 램프를 손에 넣었으나 마술사와 실랑이하다 동굴에 갇혀버린다. 이때 마법의 반지 힘으로 집에 돌아온 알라딘은 램프의 정령 덕분에 부자가 된다.
그는 술탄의 외동딸 부도르 공주와 결혼한다. 알라딘의 행복을 알게 된마술사는 복수심에 불탔다. 알라딘이 없는 사이를 틈타 그 마술사는 궁전을 아프리카로 옮긴다. 반지의 정령으로 아프리카에 도착한 알라딘은 아내인 부도르 공주를 만난다.
공주의 지혜로 마술사에게 약을 먹여 잠들게 하고 램프를 찾는다. 알라딘은 다시 공주와 행복한 생활로 돌아가고 술탄에게 넘겨진 마술사는 처형당하고 만다. 아라비아 민화인 《천일야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로젠탈은 중간 크기의 접시 위에 코발트색의 바탕에 금박의 무늬로 접시 둘레를 치장하였고 그 속에 한 장면씩 순서대로 묘사하였다. 2번 접시는 15세의 알라딘이 동네 소년들과 어울려 놀이를 즐기는 풍경이다. 터번으로 머리를 두른 동자의 짓궂은 표정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모습이다.
9번의 접시는 알라딘이 말을 타고 술탄이 있는 아프리카로 떠나는 장면이다. 말을 탄 알라딘의 표정과 말의 장식은 신나는 세계로 보는 이를 몰아넣는다. 12번은 부도르 공주와 다정하게 재회하는 장면이다. 더 할 수 없는 화려한 색감의 조화로 치장한 알라딘과 특이한 금박으로 악센트를 준 공주의 드레스와 아라비아 여인의 높은 매부리코가 실감을 더해주고 있다. 이 접시들은 나에게 가장 귀한 보물이다.
더하여 알프스의 산자락에 위치한 산장에서 하룻밤 묶었을 때 보았던 풍광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몸과 마음을 휘감은 새벽의 참신한 공기, 산장을 둘러싸고 있는 수백 년의 나무들, 어디선가 은은히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 이 모두가 어우러져 알프스를 노래하고 있다. 산장의 귀퉁이에 진열된 이름 모를 꽃과 이파리를 오묘하게 그려 넣은 나무접시와 촛대는 그 순간을 음미하기에 충분하다.
장식장을 채우고 있는 저마다의 추억을 가진 소품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자리하고 있다. 장식장 안에 들어있는 추억의 무수한 조각들은 오늘의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자산이고, 그 풍요는 내 역사 속에 존재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위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