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열정, 나의 소망 (17화)

처음 의사의 꿈을 가진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이다. 장래 희망을 쓰라는 생활기록부에 ‘의사’를 써넣었다. 아마도 고인이 되신 아버지를 비롯하여 집안의 어른들과 사촌오빠, 올케가 의사인지라 자연스레 나도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 당시 고열에다 편도가 부어 밥도 먹지 못하고 엄마 등에 업혀 큰댁 병원에 갔을 때 의사인 올케언니가 약 처방과 주사를 주면서 “아가씨, 이제 곧 나을 거예요.” 하면서 자상하게 나를 돌봐주었다. 언니가 진료 후 가운을 벗고 부엌으로 들어가 저녁상을 차리던 그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그 후 나는 어릴 적 꿈이 이루어져 개원 내과 의사가 되었다.

국립의료원에서 혈액종양내과를 전공하며 각종 혈액질환과 암에 대해 9년 동안 현미경을 벗 삼아 환자 진료와 연구에 몰두하였다. 항암요법으로 치유되는 환자를 볼 때면 가슴 뿌듯하고 보람도 있고 완치시킬 방법은 없을까 하는 숙제를 마음속 깊이 간직하였다.

어릴 적 꿈이 이루어져 개원 내과 의사가 되어...

의사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치료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혼란

이런 와중에 혈액종양 분야를 좀 더 공부하기 위해 덴마크로 연수를 갔다. 처음에는 향수병으로 자녀들과 가족이 보고 싶어 전화통을 붙잡고 많이도 울었다. 그 당시는 휴대전화도 없고 오직 유선으로 통화해야 하니 시간 맞추기가 어려웠다. 그런 암흑시대를 살면서 골수이식 환자와 혈액종양 환자를 보고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어떤 분야에 집중할까 생각에 잠기곤 하였다.

3개월이 지난 후 남편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의과대학 심장내과 교환교수로 오게 되었다. 1980년도에는 관상동맥 질환에 의한 협심증 치료는 내과적 약물 치료나 관상동맥 우회수술로 치료하였으나, 그 당시 프랑크푸르트 의대 병원에서는 풍선 확장술로 협심증 치료를 활발히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남편은 심장내과 과장이었던 Kaltenbach 교수와 Kober 교수등의 팀에 합류하여 관상동맥 풍선 확장술의 시술을 경험하게 되었으며 1983년 연세의대 병원으로 귀환하여 국내 최초로 관상동맥 풍선 확장술을 성공적으로 시술하였고 지금은 더욱 발전되어 스탠트 삽입술이 보편화 되었다.

나를 초대한 덴마크의 Larsen 교수는 외로워하는 나를 흔쾌히 남편이 있는 독일로 갈 수 있게 해주었다. 프랑크푸르트 의대로 간 나는 혈액 내과의 Kaltwasser 교수와 같이 종양 표지 인자에 대한 연구로 ‘S-ferritin(종양세포표지자)에 대한 tumor cell marker’ 즉 각종 암에 대해 종양 표지 인자인 페리틴에 대해 연구하여 〈Tumor(종양)〉잡지에 논문을 발표하였다.

▲ 덴마크 연수시 독일 프랑크푸르트 의과대학 심장내과 교환교수로 온 남편과 무너진 독일 베를린장벽 앞에서

암센터에 매일 출근하며 소아, 성인의 혈액암과 각종 고형암에 대해 혈중 페리틴(Ferritin)이 종양 표지인자로 의미가 있는지를 연구하는 프로젝트이다. 그 연구는 의미 있는 결과를 얻어 발표하였다. 일 년이라는 세월 동안 독일과 덴마크의 진료실에서 그들은 암 환자에 대한 항암요법을 어떤 방법으로 시행하며, 전공의 수련 과정은 어떻게 진행하는지, 임상연구는 기초분야와 같이하는지, 그 과정을 지켜본 일은 나의 의사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덴마크에서 Larsen 교수가 노인환자의 팔짱을 끼고 소파에 앉혀가며 진료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국에 돌아가 진료하는 방법과 환자에 대한 마음가짐을 바꾸어보겠다고 다짐하였다.

전공 분야를 특성화하여 소신껏 환자치료를 해보겠다는 각오로 한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국립병원은 연구를 위한 장비를 구입하는 결제 과정이 복잡해 장벽에 가로막혔다. 혈액암 환자들을 열심히 치료하여 관해에 도달하였으나 완치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세월이 가면 재발하고 또 치료하고… 그러면서 정이 들었는데 환자는 결국, 하늘나라로 가버린다.

이러한 반복된 과정은 나 자신을 얼마나 지치고 초라하게 만드는지. 한편으로는 그렇게 재미있었던 학문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를 하고 살려야 하는데. 죽음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환자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의사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치료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혼란에 빠졌다. 내가 과연 얼마나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을지 번민하면서 아예 혈액종양이라는 학문 자체를 포기하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개원을 하게 된 첫 번째 동기다.

괴로운 마음에 기도도 해 보고 마음을 다스려 새로운 다짐을 해 보지만 학문에 대한 권태와 우울한 마음은 점점 깊어만 갔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혈액종양학에 대한 미련과 대학교수가 되고 싶었던 꿈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

다행히 학문적인 분야는 심장내과를 전공한 남편이 대신하여 나의 공허한 부분을 채워주었다. 나는 두 딸에 이어 예상하지 못했던 쌍둥이 아들까지 낳게 되었다. 네 명의 자녀 교육비를 위해서라도 한 명은 개원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조언이 또 다른 개원의 이유가 되었다. 한사람이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진작 깨달았다면 그토록 고민하지 않았으리라.

개원하자 내 생활은 더 바빠졌다. 남편의 학회 활동, 환자 진료, 후학양성, 심장 분야의 새로운 시술 등 바쁜 일정 속에서 나는 전공 분야를 살리지 못하는 무식한 의사가 된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을 보상이라도 하듯 한국 여자의사회, 의사협회, 이화의대 동창회, 개원내과의사회, 위장내시경학회 등에서 보직의 요청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며 오늘 날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남편은 연세의대 심장내과 교수를 정년퇴임하고 차 의과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제2의 교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어느새 내 인생도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개원의로 지내온 나는 진료 외에 각 협회 및 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제 4명의 자녀는 모두 결혼하여 각자의 전공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나는 농부의 수확하는 기분을 알 것 같다. 남은 인생은 나 자신을 지키면서 찾아오는 환자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진료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혜택을 받으며 건강하게 지나온 나를 돌아보며 더욱 겸손하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삶을 채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