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와 농약회사 (26회)
  제5장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재직시절1

석 선생님 댁에 약 2년 신세를 진후 영동에서 혼자되신 누님이 올라오시게 되어 용두동의 방이 둘이 있는 집으로 옮겨 약 1년 있다가 다시 노량진에 있는 제1한강다리 남쪽에 약 1년 살고 영등포에서 약 6개월 사는 등 수원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셋방을 이곳저곳에 옮겨 다니면서 살았다. 

이러한 궁핍한 생활에서 제종 되시는 박노상 형님의 신세도 여러모로 많이 지게 되었다. 이 지면을 빌어서 새삼스럽게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1955년 3월 24일에 장남 중호가 출생했다. 위에 두 딸을 낳았으니 누구나가 딸을 둘 낳으면 셋째도 딸을 낳는다는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내자는 언제나 또 딸을 낳으면 어쩌나 하며 근심걱정이 끊일 날이 없었는데, 아들을 낳았으니 그 기쁨이 어디에 비길 것인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들딸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들 하나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사인 모양이다. 

휴전도 되고 세상도 정리되어 가니 국가에서는 대학에 다니다가 군에 입대한 군인에 대하여 학창에 복귀시켜야 되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때까지 부상을 당하지 않은 한 군에서 장교제대는 있을 수 없었다. 국가 방침에 따라 육군사관학교에서도 학창복귀 신청을 받으므로 나도 대학원을 다니다말았으니, 신청해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 인사권이 육사에 귀속되어 있었으나, 원래가 병기장교이니 병기감실의 승인도 있어야 했던 모양이다. 

후에 알고 보니 그 당시 병기감실에 있었던 농대 농화학과 동문인 신영진 형이 상당한 애를 쓴 모양이다. 새삼스럽게 이 지면을 빌어 그 신세에 대하여 감사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하여튼 다른 학창 복귀 장교와 함께 나도 55년 10월 10일부로 예비역 대위로 예편명령이 났다. 

이때 교수부 장교가 무더기로 제대를 하게 되니 육사교육에 공백이 생길 수 있어 문제가 되었으므로, 56년 2월까지 문관강사로서 먼저와 같이 화학 강의를 맡았다. 이 사이 <한진농약주식회사>에 취직을 하여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처음 나온 2,4-D제초제를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오래 근무하던 군대를 제대할 때도 한 푼의 돈도 받지 못하였고, 제대시켜주는 것만 감지덕지하였으니 정말 정부에서도 너무한 처사였다. 

제대를 하고나니 겉으로는 멀쩡하나 집안에는 물론이고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빈털터리였다. 

▲ 전역증

그런데 회사에서 첫 월급을 받았다. 그 당시 우리집 형평으로는 큰 돈이었다. 온 집안에 화기가 돌았다. 며칠 지나 큰아들인 중호 돌이 돌아와 장모님도 오시고 하여 처음으로 푸짐하게 잔치를 차리게 하기 위하여 돈을 가방에 넣고 동대문 시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물건을 사려고 보니 그 돈이 깜쪽 같이 없어진 것이 아닌가! 

날치기 당한 것이다. 할 수 없이 빈손으로 돌아오니 다시 온 집안이 암담해졌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그 놈을 잡아야지 하고 그 가방에 헌 종이를 돈같이 뭉쳐 싸고 밖에만 5천원짜리 돈을 부쳐 다시 동대문 시장으로 가서 아까 지났던 길을 돌아다니다 나중에 집에 와보니 그것도 깜쪽 같이 사라진 것이다. 

할 수 없다. 아직 나는 그만한 돈을 만질 처지가 못 되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회사에 근무하고 나서부터는 차차 생활이 나아졌다. 그렇게 어렵게 다녔던 대학원도 3월에 졸업하게 되어 석사학위도 땄다. 그러나 그 회사에서는 곧 농약을 공급할 시기가 되어 눈코뜰 새 없는 시기였다. 
 
▲ 농약회사 연구실 (1956.)

이때에 나의 귀여운 맏딸 상호가 한 달 후면 국민학교에 가기 위해 쎄라복까지 장만해 입고 재롱을 떨다 척추 어디가 잘못되어 병명도 잘 모른 채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시켜 수술을 시켰으나 별 효과 없이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말았다. 

일찍이 보내고 나서 미련이 남아 하는 소리가 아니라 누가 보아도 너무나 예쁘고 잘 생겨 영동의 집에 있을 때는 지나가던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걸음을 멈추고 둘러싸므로 언제나 “애들 봐” 하고 소리를 질러 급히 어른이 달려가 둘러싸인 사람 속에서 데려내 오기 일쑤였고, 기차여행을 할 때에도 내 좌석에는 있지 못하고 옆 사람들이 데려가 과자를 사주는 등 인기가 대단하였었다. 

이러한 추억이 모두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 당시의 아내의 슬픈 심정, 어떻게 표현하랴. 아나, 내딸 상호야! 잘못 만난 부모를 용서하고 부디 저 하늘나라에서의 명복을 빈다. 

57년이 되어 수원의 모교에 계신 김호식 선생님께서는 속히 수원에 오라는 전갈을 여러 번 보내왔다. 

1957년 3월 김호식 선생님이 수원에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은 후에도 몇 번이나 독촉을 받고서야 학교에 갔다. 그것은 군복무의 회고에서 썼듯이 군에서 무료봉사한 것에 비하면 한진농약회사에서는 보수도 두둑해서 갑자기 생활형편이 좋아져 그 당시로서는 학교에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많이 망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호랑이 같은 어른이 명령이니 아니 갈수도 없어 학교에 와보니 이미 각 학교의 시간표에 내 이름이 여러 곳에 들어 있는데, 과목수는 일반화학, 농약화학, 농약학의 세 가지 였다. 

할 수 없다. 서울의 농약회사는 당분간 그대로 다니면서 수원에 시간 있는 날만 나와 강의를 하기로 하였다. 일반화학은 1학년 전체(농학과, 축산학과, 수의학과, 임학과, 농공학과, 농화학과, 농경제학과)에 강의와 약간의 시범실험을 하였고, 농약학은 농학과와 잠사학과 3학년에게, 농약화학은 농화학과와 농생물학과 4학년에 강의 하였다. 

일반화학 강의는 전에 육군사관학교에서 하던 것이니, 별 문제가 없으나 농약관계 강의는 원래 이성환 선생님이 맡아왔던 것인데, 마침 미국에 가고 없으니 농약회사에 있다고 하여 내가 맡게 된 모양인데, 이것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약간의 준비를 한 노트가 있었으나 처음 강의하는 것이므로 자연히 진도가 빠르고 보니 밑천이 떨어지기 일쑤인 것이다. 

학교에서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나서는 이번에 서울에 가면 충분한 노트를 만들어야지 마음을 먹으나 서울에 가서는 회사일도 있고 하여 잘 되지 않았다. 이리하여 겨우겨우 1학기가 지나 방학 때가 되어 좀 넉넉히 노트를 만들기는 하였으나, 다음 학기도 중간이후가 되니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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