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진 사건에서의 한 학생 지도 (36회)
  제6장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재직시절2

조덕현 교수의 죽음        

필자와 대학 때부터 거의 같이 지내다시피 한 같은 과의 조덕현 교수가 74년 11월 19일 오전 2시 20분에 작고하였다. 

조 교수는 같은 학과를 같이 다녔을 뿐 아니라 군에서도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같이 근무하였으며, 농과대학 발령도 거의 같은 시기에 받았다. 조 교수는 중간에 미국에 가서 많은 연구를 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수재 교수로서 장래가 지극히 촉망받던 과학자였으나 평상시 혈압이 약간 높아 본인도 상당히 여러 가지 면에서 자제하여 왔었다. 

작고하기 하루 전인 11월 18일에 미국에서 공부하던 농화학과를 졸업한 제자인 이경범 군이 오랜만에 학교를 찾아왔다. 함께 시내 음식점에 가서 여러 가지 이아기를 하면서 식사대접을 받고 나서 나는 집으로 오고 조 교수와 이 동문 두 사람이 서울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하여 갔는데, 도중 조 교수가 이상하여 즉시 빈센트병원에 입원시켰다고 한다. 

내가 집에 와서 옷을 벗고 세수를 하다가 연락을 받고 밖으로 나갔으나 차를 쉽게 잡지 못하여 약간 늦게 병원에 도착한 즉 농화학과의 임선욱 교수와 유순호 교수가 이미 와 있었으나 본인은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다. 

응급실의 담당 의사에게 물어본즉 별일 없을 것이라 하므로 평상시 건강이 좋지 못한 것으로 듣고 있는 조교수의 부인에게 놀랄 것을 염려하여 의사의 말대로 안심되게끔 연락을 하고 밤을 지냈으나, 그날 밤 청천벽력과 같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의사의 말만 듣고 그대로 집에 전화한 것이 나의 불찰이며 절친한 친수를 잃어가며 후에 가족의 원망을 많이 듣게 되었다. 

오호라 친구 조덕현아! 이 땅에서 못다한 뜻 천당에 가서 마음껏 활짝 펴며 고이 잠들지어다. 그리고 명복을 빌어 마지않는다. 

OOO

12월부터 필자가 지도교수로 되어 있는 서울대학교 가정대학에 있는 반수미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을 심사하기 시작하여 다음해 1월에 종심, 2월에 농학 박사 학위를 받게 하였다. 

1975년이 되어 강의 할당과목은 대학원 과목으로 1학기에 고등영양화학, 2학기에 곡물이용학을 맡는 것 이외에는 1973년도와 대체로 똑같았다. 

이동석 교수의 죽음 

1975년도에도 여러 가지 일이 많았는데, 3월 6일에 대학 농화학과 동기이고 그 당시 한양대학교 초급대학장이었던 이동석 교수가 작고하였다. 옛날 3학년 때인가 그 친구가 결혼을 고향집인 포항에서 할 때는 농화학과 과장이었던 최경상 선생님에게 우리 3학년 전부가 이 군의 결혼축하를 갔다 올 터이니 휴강을 해달라고 간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해 할 수 없이 3학년 전부가 무단 휴강을 해가며 포항까지 가서 축하하고 대접받고 여기저기 구경하고 돌아온 기억이 새롭게 되살아난다. 

이 교수는 언제나 그 부인과 함께 다 같이 인자하시어 전에 우리 아이들이 서울에서 중고등학교 다닐 때 상당한 기간 동안 맡아 기르기도 하여 여러 가지로 우리들이 신세를 많이 진 친구인데도 이들 내외분이 한 달 간격도 두지 않고 저 세상 사람이 되었으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때까지 여러 가지로 감내하기 어려운 고난의 생을 걸어와 이제 막 실력을 발휘하여 꽃이 피려고 할 찰나에 데려가시다니 염라대왕도 너무 하시다! 오호라 어쨌든 이제 유명을 달리 하셨으니 두 분의 명복이나 빌 수밖에! 

김상진 사건에서의 한 학생 지도

1975년 3월 4일에 학교에서 학생데모가 또 일어났다. 여러 가지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그때는 학생들의 신상을 거의 파악하여 그 일거수일투족을 거의 예의주시하면서 지도하고 있었다. 
 
▲ 사건 13년 후인 김상진 열사의 모교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한겨레신문 1988녕 11월 20일자 기사

그런데 농과대학에서 대표적인 이념서클인 <한얼>의 회장인 S군이 아무래도 이상한 점이 있어 교수인 내가 지도하여도 서클학생들에 대한 의리들을 감안할 때 순순히 내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따라서 생각 끝에 할 수 없이 즉시 본집으로 연락하였더니, 부친이 곧 올라와서 불문곡직하고 11일 S군을 끌고 경상도의 집으로 가버렸다. 

보통 집안과 같이 부권이 세지 못하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S군은 찍소리 한마디 못하고 아버지에게 끌려가버린 것이다. 서클동료들도 S군이 아버지에게 끌려가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다음날 일이 터졌다. 그날 4월 12일 한얼의 회원인 김상진 군이 자해하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은 시국문제로 학생이 자해한 것으로는 그 당시로는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니만큼 교육계는 물론 일반사회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므로 이 사건에 대한 전면 수사가 시작되었다.

조사해보니 데모 때 돌린 인쇄물의 필체가 S군의 것일뿐 아니라 그 거사의 모임 장소도 S군의 하숙집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고, 더욱이 회장직을 맡고 있었으니 그 책임을 면하기는 더욱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큰 탕감거리는 사건당일에 본인이 그 현장에 본인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S군의 부친은 경찰서에 가서 자기 아들을 공부하러 보냈더니 데모모의나 하니 그 놈을 잡아넣으라는 등으로 큰소리 쳐대니 아마 이와 같은 아버지의 결연한 태도에 경찰은 상당한 감동과 동정이 갔으리라. 이러한 것들이 참작되었는지 결과적으로 경찰에 구속되는 것을 면하게 되었고, 학교에서도 퇴학은 되지 않고 무기휴학 정도로 끝났다.

방학이 되어 선생님들로 하여금 문제 학생의 가정을 방문하게 되어 있어 필자도 S군의 집에 찾아갔다. 사실 시골에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식품공학과에 다닌다는 것은 대단한 자랑거리였으나 학교에서 처벌을 받고 집에 돌아온 학생의 존재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더욱이 엄한 아버지를 둔 S군의 처지는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집에서 “이놈! 공부하라고 빚까지 내가면서 돈을 쳐들어 학교에 보냈더니, 데모 앞잡이를 서!” 구박이 말이 아닌 것이다. 밖으로 나가도 “학기 중인데 어떻게 집에 왔느냐?” 묻는 동네 사람에게 대답한 말이 없어서 우물쭈물 넘길 터이니, 그 심사 어떠하리. 

그때는 군입대를 할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인지라 몇 달을 기다려 비로소 입대하게 되어 군복무를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군복무를 마치고 복교하였으니, 그간 공백은 약간 생겼으나 위험한 고비는 큰 상처없이 넘기게 된 셈이다. 

이 사건이 났을 때 집에 연락이 안 되어 부친이 올라오지 못했거나 올라왔다 해도 보통집안에서와 같이 부친의 파쇼권이 통하지 못하였더라면 구속을 면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퇴학조치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S군의 일생의 행로가 바뀌게 되었을지 모른다.

S군은 그후 공부를 열심히 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망한 과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실력을 발휘하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첫 딸 서양화를 하다 (3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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