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집행렬에서 이탈 (15회)
  제3장 한국전쟁의 발발과 피난

어느 날 이때까지 해오던 것과 같이 그날도 학생들과 함께 사상역에 냐가서 군인이 출정나가는 것을 환송하였으나, 나는 학급의 담임을 맡지 않고 있었으므로 다른 선생보다 조금 일찍 그 당시 교무실로 사용하고 있던 교장 사택에 왔더니 책상 위에 빨간 줄을 친 징집영장이 수없이 놓여 있었다. 

소사에게 물어보니 내 것도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신병 또는 신임장교로 입대하면 보통 1개월 내에 반 이상이 부상하거나 전사하게 되어 있어 소모품 병사 또는 소모품 소위라는 말이 있을 때이다. 이것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닌 생사에 관계되는 일생일대의 큰일이다. 

나에게도 징집영장이 나왔으니 군에 가야 한다. 그것도 사병으로 말이다. 신병이 사상중학교에서 훈련하는 것을 보면 2주일간 총 쏘는 방법만 배워 일선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한 달이나 두 달 내에 부상 아니면 전사인 것이다. 아찔하다. 

남아있는 연로하신 부모님은 어찌되며 아내와 어린아이의 장래는? 이것저것 생각이 착잡한데 무슨 하늘에 솟아 날 방도가 없을까?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마침 그 당시 신문에 병기사관후보생 모집광고를 본 것이 생각났다. 다행히 대학교졸업장만은 가지고 왔으므로 가능하면 병기장교로 가는 것이 어느 모로 보나 상책일 것 같아 아버지로 하여금 졸업장을 가지고 급히 부산에 가시게 하여 응시원서를 접수시켰던 것이다. 

해가 질 때쯤이 되어 학교에 나가보니 다른 사람도 아닌 학교 교사인 내가 도망을 쳤다고 야단들이다. 그러나 학교 교장에게 병기사관후보생 응시 접수증을 보여 그 일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당장 다른 선생과 함께 사병 징집영장을 받았으므로 일단은 다음날 교정 앞의 대로의 집합장소에 주먹밥을 싸가지고 가서 행렬에 끼게 되었다. 학생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평상시와 같이 학교에 공부하러왔다가 겨의 대부분의 선생님이 군대에 가게 되어 줄을 서있는 것을 보고 모두가 울기 시작하여 집합장은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모병관의 일장의 공갈조의 훈시, 지시가 끝난 후 나는 겁에 질려 조심조심 앞에 나가 모병관에게 가서 병기사관후보생 응시 수험증을 보였더니 안 된다는 소리만 버럭 지르고,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일행과 함께 모병관의 인솔에 따라 동래로 행군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 이상한 일은 면장이 차를 타고 도보 행진하는 행렬에 와서 모병관과 언쟁을 하면 행렬이 일시 정지되었다가 또 다시 행진하고 정지되는 것을 수차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사상중학교의 다른 교사가 행렬에 와서 1~2 사람 가만히 빠져나가 숨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것으로 무엇인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후에 알고 보니 사실 공무원은 원래 징집이 연기되는 것인데, 무슨 일인가 면장과 모병관 사이에 혼란이 생겨 교사는 물론 면서기까지 징집영장을 모조리 발부하였던 것이다. 
 
▲ 사상중학교 신분증

걸어가면서 생각하였다. 일생에서 중요한 순간이다. 나는 행렬에서 빠져나가자. 그 당시 우리의 관념으로는 일제시대에 군징집 관계로 만일 달아나다가 들키면 무조건 총살이라는 말을 들은 바 있어 만일 달아나다가 들키면 어떻게 될까? 그때 가서는 병기사관 병기사관 후보생을 응시하기 위하여 나갔다 하면 총살은 면하겠지. 

에라 모르겠다, 운명에 맡기고 결행하자. 그래서 행렬이 곽외로 나가 긴 줄을 지어 행군하는 사이에 집 옆에 서서 소변을 보는 흉내를 하고 있었더니 일행은 별 관심없이 지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마침 행렬에 뒤 따라 오시는 누님이 가까이 오시자 누님에게 내가 이 행렬에서 이탈할 것을 전하였더니 “얘가 무슨 소리 하는 것이냐. 들키면 총살이야.” 하시면서 손을 저으시는 것이었다. 알았으니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걱정 말고 돌아가시라 이르고 다시 행렬에 복귀하여 얼마동안 걸어가다가 길옆의 지형이 벼도 잘 자라고 나무도 있어 숨기에 유리한 지점에 가서 다시 먼저와 같은 행동을 되풀이 하여 동래에 가지 않고 행렬에서 빠져서 서쪽편의 길로 부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병기사관후보생 응시 날이 다가와서 시험장에 나가보았더니 응시자 모두가 하나같이 친척집 등의 다락방 같은 데에 숨어 초조한 나날을 모내다가 견디지 못하여 이것을 호기로 병기사관 후보생에 응시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는 나중에 장군까지 된 농과대학 농화학과 동기생인 신석진 동문, 그리고 그 당시 목포고등학교 교사인 윤한교 동문(그 후 충남대학교 농과대학 교수였다가 정년 퇴임)과 그 동생인 윤한상(현 부산대학교 공과대학장)도 보였다. 윤한상 동문은 첫날만 시험을 치고 둘째 날부터 나오지 않았다. 

시험을 치고 나서 시일이 지나 시험결과가 나와 합격통지를 받았으나 그 당시 병기장교 교육은 병기학교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병기 4기 합격자 전원을 한꺼번에 교육시킬 수 없어서 여러 차로 나누어 2주 간격으로 동래고등학교에 있는 육군종합학교에 보병과 함께 입교훈련을 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4차가 되어 처음 입교하는 1차보다 훈련을 받기 위하여 거의 1개월 반 후에 보병14기와 함께 입교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그간 상당한 시일이 남아 있었다. 그 사이에 9월 18일이 되어 국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북진하여 전세가 호전되어 이제 군입대까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이 생각도 되었다. 

그 당시 일반적인 여론은 피난가지 못하고 서울을 위시한 인민군 점령지에 그대로 남아있던 사람은 모조리 공직에서 파면될 것이므로 일단 수복만 되면 정부의 높은 감투자리는 얼마든지 있을 터이니 피난만 했으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 소문도 나에게는 나쁘지 않았다. 여하튼 희망한 일이었다. 

그 후 영동집에 돌아와 보니 집 건물은 큰 피해가 없었으나, 영동의 학교에 가보니 전장의 마수같은 느낌을 주고, 시내에 나붙은 흰 종이에는 농과대학의 학적부를 갖다 주면 후사하겠다는 방이 붙어 있었다. 

서울에 가서 이전에 농화학과 과장이였던 최경상 선생님을 뵈오니, 그분은 초라한 생활에 학교문제에 대해서는 언제 복구될지 모르겠다 하시면서 비관적인 말씀을 하셨다. 

그러던 차에 중공군 참전의 소식이 들려와 수원에 다시 와서 그 당시 학장님이셨던 조백현 선생님을 뵙고 학교관계를 상담 드렸는데 최 선생님과 같은 의견이었다. 나는 병기사관후보생 합격 건을 말씀드렸더니 그 당시는 젊은 사람들의 처신이 대단히 어려운 때이라 그것참 좋은 방도라 하시며 전쟁이 계속되더라도 얼마나 오래가겠느냐고 하셨다. 

그때는 누구나가 전쟁은 가부간에 탁월한 시일 내에 끝이 날 것으로 보고 있었으므로 나의 군입대를 적극 찬동하시었다.

 
  영동에서 구미, 구미에서 사상으로 (14회)
  병기사관 후보생 입대 (1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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