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소의 살벌한 군기 (17회)
  제4장 전쟁 중의 입대와 군복무

2시간쯤 지나니 상당한 수의 후보생이 쓰러져 넘어지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안되겠다 싶었던 모양이다. 한 장교가 나오더니 전 후보생은 내무반에 들어가라는 것이다. 

나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보았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았는가? 아니 오늘밤을 자봐야지 알지, 죽지는 않더라도 아마 감기 아닌 깊은 병에 필경 걸기고 말았을 거야. 하여튼 자고 나서보자. 

다음날 아침에 기상나팔이 불러 허둥지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합하였다. 목을 만져보았다. 목이 분명히 붙어 있으니, 살기는 살아있는 모양인데, 기침을 해보니 약간 감기 들었을 때의 기침이 난다. 언제나 나는 기침보다는 약간 심한 편이며, 이것으로 드러누우면 중환자가 될 것 같았다. 

이제 나에게는 내 자신의 의사도 소용없어 무리하면 건강을 헤친다는 이 평범한 의학의 이치도 소용이 벗다. 내 혼이 빠져 나간 지는 이미 오래되었으니, 그저 반 무의식적으로 기계적으로 하라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사회에서 위생관념이라는 것도 목말라 비틀러진지 오래다. 

훈련소의 북쪽의 산속에서 쫄쫄 흘러내려오는 도랑이 있었는데, 그 많은 후보생이 뒤엉켜서 세수도 하고 그 많은 밥그릇을 씻어대니 콧물도 들어갈 것이고, 엉망진창이다. 위생이라는 것은 씨가 마른지 이미 오래다. 결과적으로 이 비위생적인 것과 인간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기합으로도 아직 나는 큰 탈은 없다. 

여기에도 또 하나의 진리가 있는가 보다. 일반사회 같으면 언론이 야단나고 환자투성일 것이다. 다른 사람도 별일은 없는 것 같았다. 입교하고 여기 일주일 동안은 매일 밤 이때까지 일생 지나온 여러 가지 일들과 잡스러운 인생철학이 수없이 생겨났으나, 이런 이념도 이제 무디어졌는지, 별 감상이 없다.  

다만 한없이 배고프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다. 가진 돈이 없으니 사 먹을 도리는 더욱ㄱ없다. 식사 때 당번이 밥을 그릇에 담아서 각자 앞에 돌리면 어쩐지 내 것은 적고 옆의 것이 많아 보인다. 꾀를 내서 슬쩍 밥그릇을 바꿔보니 역시 내 것이 적고 아까 것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드물게 돌아오는 식사 당번이 되면 수지가 상당히 맞는다. 훈련에서 돌아온 후보생이 미처 방에 들어오기 전에 당번이 먼저 들어와서 밥을 플때 누구나가 먼저 한주먹씩 밥을 먹어가면서 밥을 푸니 그 사이에 먹는 양이 얼마인가! 여기에는 도덕도 희생(犧牲) 정신도 약을 할래야 찾아볼수 없다. 

그때는 교육장이 3km 이상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경우가 많았으나 차량으로 왕래하는 수가 없다. 그 당시는 차라는 것은 모조리 전선의 전쟁하는 곳으로 동원되었으므로 도대체 후방에는 차량이 별로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오후에 교육시간 까지 그 먼 곳의 교육장에 가려면 별수 없이 점심시간을 절약할 수밖에 없다. 

오전에 먼 교육장에 정해진 시간에 맞게 가려면 지금 곧 떠나야 하기 때문이었다. 누구나가 밥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정신없이 입으로 퍼 넣는다. 집합호령에도 잘 움직이지 않으니까 한쪽에서 조교가 몽둥이를 가지고 엉덩이를 후려갈기기 시작한다. 엉덩이를 얻어맞으면서 이번 놓치면 다시 못 볼 한 덩어리의 밥을 놓칠 새라 입에 퍼 넣으면서 바쁘다 바빠, 어쩔 수 없이 몽둥이를 맞으면서 발만 천천히 움직여 간다. 
 
▲ 한국전쟁 당시 주먹밥을 먹는 국군 [출처 ; 전쟁기념관]

입교하면 첫 번째 한주일 동안은 외출이 없다. 훈련장에 가는 도중에 일반 사람이 여유작작하게 걸어가는 것을 보면 나도 저런 세상에 살아본 일이 있었는지 도무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만 도망칠까. 군법시간의 공갈이 생각이 난다. 잘못하면 총살이고 잘 하면 제주도에 있는 졸병을 훈련시켜 일선에 보내는 제2 훈련소에 가게 되니 그것도 이것도 안 되겠다. 에따, 모르겠다. 그냥 되는 대로 움직여라. 

입교 후 일주일이 지나면 외출이 되지만 나는 어디 갈 곳이 없다. 전쟁 중이라 여행을 하려면 여행허가증이 필요할 때인지라 집에서 누가 면회를 온다는 것도 생각도 못한다. 어디 가서 쪼그린 채 배를 채울 수 있는 곳도 별로 있을 리 없다. 아까 적었지만 화폐개혁으로 돈도 못 가져왔으니 아무것도 사먹을 수가 없다. 

외출하여 동래시내를 돌아다녀 봐도 별수가 없다. 에라 모르겠다. 다시 학교에 돌아와서 같은 처지의 후보생과 함께 신세타령이라도 하니 서로 위안이 되어 오히려 속이 더 편했다. 

나는 병기 장교 후보생 4기로 합격되었으나, 이것을 1, 2, 3, 4, 5, 6차로 나누어서 몇 명씩을 처음의 보병교육을 보병병과와 함께 받게 되어 있어 5차에 해당되는 나는 8주간을 종합학교에서 보병 14기와 함께 교육을 받은 다음 나머지 4주간을 별도로 병기교육을 받게 되어 있었다. 2주후부터는 기합도 적어 교육만 주로 받게 되니 다소 수월하기는 하나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오후교육에서는 후보생의 반 이상은 졸고 있었다. 

훈련도중 쉬는 시간에 보병 14기로 입교하여 훈련을 받고 있던 변승일 씨(농과 대학 농화학 동문)와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요점은 훈련을 마치면 곧 일선에 보병장교로 배치가 될 것인데, 그때는 전장에 배치되기만 하면 한달 이내에 반 이상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할 때이므로 소모품 소위라는 명칭이 붙어있던 때인지라 그 위험성에 대하여서 걱정하는 것이었다. 

사실 9월 15일 국군이 인천상륙을 하여 북진하다가 그 선봉대가 10월 5일 38선에 도달하였는데, 이미 9월 30일 워커 중장에 의하여 38선을 넘어 진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으므로 국군 3사단은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여 배양, 간성, 고성을 점령했고, 10월 4일의 유엔정치위원회에서 북한 진격이 결의된 다음 전 전선에서 파죽지세의 진격이 시작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10월 19일 평양에 입성했고, 10월 26일 제7연대는 압록강에 다다라 압록강물을 대통령에게 갖다 바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26일을 고비로 1백만 명의 중공군이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국경을 넘어와 선전포고 없이 참전하여 전세는 반전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10월 26일 중공군과 첫 전투가 있었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 희천지구에서 12만 명의, 중공군에게 패해 국군의 후퇴가 시작되었다. 

유엔군이 해공군력은 우세하였지만, 이것이 내륙지대에서의 야간전투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게 되자 맥아더 원수는 11월 29일 미8군에 총 퇴각 명령을 내렸고, 12월 말에 26개 사단의 중공군이 38선까지 밀어닥쳤다. 

그 뒤 24일에 서울시민에게 소개령이 내려졌다. 1차 피난 때 멋모르고 남아 있다가 공산당의 학정에 시달리고 수복 시에는 잔류파라 하여 백안시 당하고 부역 혐의까지 두집어 썼던 시민들은 이번에는 매서운 겨울바람에 떨려 정처 없는 피난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원산, 평양을 비롯한 함경도, 평안남도 일대와 황해도 지역 등 유엔군이 진주했던 모든 지역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눈물을 뿌리며 38선을 넘었다. 
 
전선은 계속 남하하여 임진강 방어선이 돌파당하고 1.4후퇴와 거의 동시에 서울에 들어온 중공군은 얼어붙은 한강을 빙상도하 하여 인천 방면을 석권하고 1월 7일 수원을 수중에 넣고 계속 쳐내려오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전세이므로 일선에 가면 새로운 적으로서 중공군과 전투를 하게 되었다고 하니 모두가 걱정이 태산 같았다. 다음에 치게 되는 시험을 잘못 봐서 낙제를 하면 어떨까! 여기는 낙제가 없단다. 오로지 제주도의 제2 훈련소에 가서 사병으로 훈련을 받는 길이 있을 뿐이란다.

 
  병기사관 후보생 입대 (1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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