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형님의 죽음과 미국행 (28회)
  제5장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재직시절1

그런데 1959년 2월 6일에 우리 큰집을 주관하여 이끌어가시던 14살 위인 큰형님께서 공장에 소요되는 물건을 사기 위하여 대구에 가셨다가 돌아가시게 된 것이었다. 

대구에 가신 다음날 대구에 있는 고종한테서 전화가 와 아버지께서 급히 내려가셔 보니 형님은 이미 의식이 없으시고 도저히 구할 가망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자 택시를 잡아 태워 대구에서 급히 달려서 영동 집에 오신 직후 숨을 거두시고 말았다. 사연인즉 대구에 가시던 날 고종 짐에 유숙하였는데, 찬물을 마시더니 쓰러지셨다 한다. 

형님의 죽음에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많다. 어째서 곧 연락을 하지 않았고, 물건 사러 가져간 돈의 행방이 묘연하니,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영동에서 돌아가실 때 등에 이상한 태독점같은 것이 나타나 누구 말로는 유해물질을 먹었을 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심되는 장본인인 고종이란 사람은 그때 같이 오지를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일절 소식이 없다. 형님께서는 본격적으로 경찰에 조사를 의뢰하고자 하였으나 아버지께서는 침묵만 지키시고 계시는데, 사후 처리 문제를 생각할 때 이왕 돌아가신 것을 문제를 일으켜봤자 다시 살아오시는 것도 아닌 이상, 장례만 늦어지고 하니 그대로 수원 화신리에 있는 산소에 장사지내고 말았다. 

먼 훗날 아버지께서 형님의 의문사에 대하여 언급하신 바 있으셨는데, 형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고종이 어느 날 우리 집에 와서 상당한 돈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한 일이 있었다 하니, 이것의 보복인가? 더욱이 고종은 어릴 때 구미의 우리 집에 돌아가신 큰형님과 같이 자랐으므로 다른 고종과는 다르게 친밀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러한 추측이 사실인 것 같기도 하여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고, 아무리 험악한 세상이라 하더라도 정말 있을 수 없는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형님은 나보다 14살이나 위이니 어느 면에서는 아버지같이 나의 매사를 돌보아주셨고, 그 형수님은 나를 업어서 기르시었다. 

집의 기둥이신 큰형님이 돌아가신 후로 우리 집의 가세는 점차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영동 본집 형편은 3제 중 8년 전에 작은 형님이 빨찌산의 총알에 맞아 돌아가시고 또 다시 큰 형님마저 돌아가시니 이제 연로하신 부모님과 홀로 되신 두 분 형수님, 어린 여러 조카와 질녀들만 남았으니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더욱이 빚까지 지워놓고 아내와 어린 것을 홀로 수원에 남겨두고 공부하러 간다고는 하나 이역만리에 떠나게 되나 여러 가지 감회가 착잡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갈 길인 것을, 가보는 데까지 가보는 가볼 수밖에 더 있겠는가?

미국에 떠날 때 환송나온 여러 다른 선생님 가족의 심정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어떤 선생 사모님은 참다 못하여 비행장에 환송 나온 여러 사람 앞에서 울음을 터트린 분도 있었다. 그래도 아내는 북받치는 감정을 억지로 눌러 참고 수원의 집까지 와서는 장모님이 공부하러 가는데, 무엇을 그렇게 슬퍼하느냐 하며 위로하는 것도 아무 소용없이 아랑곳하지 않고 1시간 이상 슬프게 흐느껴 울었다 한다. 
 
▲ 미네소타대학교 등록증
 
여로 동행 선생님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동경, 알래스카의 앵커리지, 시애틀을 거쳐 미국의 중부인 미네소타 주의 세인트플에 도착하여 축산과 송낙원 선생님과 학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챔스포드 1414번지에 있는 미국 사람집의 지하실을 얻어 자취생활에 들어갔다. 

도착 즉시 학교에서 용돈으로 200불을 받았고, 그 후 매달 180불을 생활비와 용돈으로 받았다. 이곳은 같은 지구이면서도 한국과 너무나 달랐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런지 식량도 부족하고 더구나 설탕은 여간해서 얻어먹기 어려웠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유니온홀에 가보니 커피를 커다란 잔에 가득 줄뿐 아니라 설탕 같은 것은 별도의 그릇에 담아 마음대로 먹으라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웬 공짜떡인가. 에라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 잘 보지 않는 구석에 가서 커피가 잔에 철철 넘칠 만큼 설탕을 퍼 넣어 마시기도 했다. 이것도 굶주린 때에 돈 안들이고 영양보충하는 한 방도이니까. 

자족생활이라고는 하나 상점에 가면 무엇이든지 없는 것이 없이 대개 갖추어져 있으니 한국에서 쪼들리던 생활을 하던 것에 비하면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자취생활에서는 조리하기 좋고 영양가가 낳다하여 닭을 사다가 냄비에 넣고 부글부글 끓여서 먹는 수가 많았다. 쌀은 그때 그곳에서는 인도형이 주이므로 특별히 일본형을 부탁해서 사왔다. 국수라고 사와서 물을 붓고 끓였더니 여간 오래 시간이 지나도 부드러워지지 않아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은 우리나라 국수와 달리 강력분 밀가루로 만든 마카로니였던 것이다. 

다른 선생님과 함께 미네폴리스 시내에 나갔다. 시내버스는 드물고 손님이 적어서 한가했다. 거리는 차가 그다지 많지 않고 조용하였다. 

백화점에 들어가 보니 정말 형광등이 사방에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어 눈이 부시는데, 벽에 걸린 커다란 거울에 비쳐보니 내 모습이 너무나 초라해보였다. 옆에 있는 미국 사람을 보니 덩치도 클 뿐만 아니라 훤하게 생긴 우량아 같이 생겨 덩치와 외모로도 우리들 엽전은 이들과 비교도 되지 않아 아무리 봐도 틀린 것 같았다. 열등감이 솟구쳤다. 

그러나 물건을 살 때 염려했던 영어가 제법 통한다. 이 정도이면 2년 정도 지나면 어느 정도는 영어도 잘 할 수 있겠지 하는 약간의 자신감도 생겨 냤다. 거리에 나가 택시를 잡아  탔다. 

어디서 왔느냐고 묻길래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였더니 북에서 왔느냐, 남에서 왔느냐 묻는 것이 아닌가. 이 사람들 정신이 있나 없나 싶었다. 한국전쟁 끝난지가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는데, 도대체 그 당시에 북한 사람이 미국에 올수 있겠는가. 자명한데도 이 사람들은 도대체 한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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