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1년차 연구생활 (29회)
  제5장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재직시절1

학교가 시작되었다. 나는 Ag, Biochemistry과에 소속되고 지도교수로는 M.O. Schulty박사로서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는 성격을 가진 분이었다. 

여기는 학기제가 아니고 Quarter제인데, 첫 Fall quarter에는 물리생화학, 동(同)실험, 연구실험방법, 고급 유기화학, 세미나를 듣게 되었다. 시간에 들어가니 어디를 가나 한국사람은 물론 일본사람도 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백묵만 가지고 와서 떠드는 교수의 말은 단편적으로 들릴 뿐 내용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짐작이 가나 전혀 종래 알지 못하던 내용은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교수가 흑판에 쓰는 것 그대로 노트를 할 따름이다. 실험은 설명인쇄물이 있어 적힌 순서대로 해나가면 되는 것 같았다. 

미네폴리스에 있는 메인 캠퍼스에서 고급 유기화학을 듣는 첫 시간 때의 일이다. 첫 유기화학 시간에 교수님이 이것 저것 이야기하다가 마지막에 다른 무슨 홀의 몇 호실에서 시험을 친다는 것이다. 귀가 번쩍 뜨였으나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다음 주 그 지정된 방에 가보니 정말 조교가 와서 시험지를 나눠주고 시험을 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유기화학을 알 리가 없고 배워도 전쟁으로 다 까먹었으니 시험을 잘 칠 리가 있겠는가. 시험이 끝나고 나서 조교에게 도대체 이 시험이 무슨 시험이냐고 물었더니, 무엇이라 대답을 하는데, 두 번 불어 봐도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먼 훗날 알고보니 그 시험만 패스히면 그 과목 수강을 면제해준다는 것이다. 그러한 제도가 있는지를 사전에 짐작도 못했으니 그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 다음부터 다시 원래의 강의실에서 고급유기화학 강의가 계속되었다. 이것저것 걱정이 태산 같았다. 

수강하는 학과목의 내용을 속 시원히 물어보고 상의할 한국사람이 없음은 물론 말이 통할 수 있는 일본사람도 없었다. 다른 미국 학생은 대개 옛날 사람의 노트와 시험문제집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런 것을 생각지도 못하고 그저 부실한 노트만 하고 있었으니 아니 불안하지 않겠는가. 

처음 미국 와서 백화점 등에 갔을 때 이것저것 물건을 살 때에도 제법 영어가 통하는 것 같았으나 학기가 시작되어 긴장한 생활이 계속되어 심신이 피로하다보니 그 알량한 영어실력도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교수의 강의내용도 도무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시간 도중에 교수가 와서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 얘기하는 것은 더욱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때 다행히 개인적으로 유학 온 인도학생이 있었는데, 그 자의 말은 내가 잘 알아들을 수 있었으므로, 그 학생에게 다시 물어서 교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겨우 알았다. 수원서 다른 과에서 온 다른 선생님은 1~2과목만 수강등록을 하는 까닭에 걱정은 마찬가지나 좀 수월한 것 같았다. 

중간시험을 쳤다. 어떻게 쓰는 것인지 주섬주섬 되지 못한 영어로 썼다. 물리생화학 시험은 문제가 어떻게나 많이 나오는지 반ㄴ밖에 못썼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은 처음부터 요점만 써나가야 겨우 문제 전부에 대하여 쓸 수 있는데, 그런 식으로 쓰는 것은 다른 학생은 이미 알고 있었다. 
 
▲ 여권

시험결과는 좋을 리가 없었다. 1~2과목만 들은 한국에서 온 다른 과 선생님은 중간시험의 결과를 모고 어떤 과목의 성적이 잘 나오지 않으면 그 선생의 지도교수는 이미 그 과목을 청강으로 돌렸다는 말도 들려온다. 

나도 지도교수를 찾아가 이것은 너무 많은 과목이니 1~2과목 청강으로 돌리겠다고 하니 불도저 지도교수는 어림도 없었다. 너는 현재 한국에서 석사를 하였으니, 그렇게 많이 듣게 하였다고 완강히 거절하는 것이었다. 

원래 Ag, Biochemistry과의 방침은 입학하여 들어온 학생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그 학생의 실력을 키워서 작용시키는 다른 과와는 달이 이 과에 들어온 학생은 처음부터 짐을 잔뜩 실려 성적이 시원치 않으면 첫 학기에 대부분 도태시켜버리는 것이었다. 별수 없다. 그대로 따를 수밖에. 

그것으로 지도교수하고는 약간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나도 똥고집이 있으니 1~2과목은 적당히 했으니, 학기말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없었다. 그런데 겨울 방학이 되니 소문이 돌았다. 원래 우리들은 2년간 있게 되어 있어도, 지도교수에 따라 학과성적 기타를 봐서 1년만으로 한국에 돌려보낸다는 것이다. 알아보니 정말이었다. 이것은 안 되겠다고 생각되었다. 

지도교수의 역할 등 여러 가지의 학교행정, 사회구조를 볼 때 공산주의가 조직의 사회라고 하나 분명히 미국은 다른 면에서 또 다른, 철저히 조직화된 사회임을 통감했다. 

1960년 Winter quarter에서 백화점, 동실험, 탄수화물, 동실험, 세미나, 특수연구를 들었으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탄수화물 실험시간이 되면 아무 인쇄물도 주지 않고 교수가 흑판에 실험제목만 몇자 적고 말로만 이야기하고 마는데, 매주일 실험 제목 1개씩을 주고 설명해나가는 것이었다. 실험제목은 알았으나, 자세한 설명문이 없으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식산 중에는 다른 학생들이 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시간이 다되어 다른 학생이 들어간 다음부터 시작하여 밤샘하는 것이었다. 

그밖에 매주 한 제목씩을 주니 실험제목을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도저히 전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하랴. 갈 때까지 가야지. 매일 밤 1시가 되어서야 겨우 집에 돌아가 잤다. 

이럭저럭 학기 시험을 쳐서 여러 가지 과목의 성적이 나왔다. 노트가 부실한 것, 영어가 서툴러서 걱정하는 것에 비하면, 월등히 만족할 결과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다른 학생들도 ‘축하한다’ 하였다. 

여기서 다시 깨달은 것은 자연과학과목의 성적은 영어 잘하는 것보다는 내용을 이미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는 실력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나와 같은 과목을 듣는 다른 한국선생님이 나보다 몇 년 앞서 미국에 와있어 영어도 잘하므로 성적이 잘 나오겠지, 기대했으나 그 결과가 신통치 않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1960년 5월에 1년간의 성적 평가로서 1년간 더 연장한다는 통고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교수 중에서 1년간으로 돌아가게 된 교수는 몇 명 있었는데, 그 분의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그 다음 Spring Quarter에는 산소학, 동실험, 지질학, 산소실험, 동물영양 실험을 들었으나, 성적은 잘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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