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별세 (32회)
  제5장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재직시절1

어머니의 별세 

1966년 4월 2일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경북 인동에서 옥산 장씨로 태어나시어 18살의 어린 나이로 저의 집으로 오셔서 가난하고 구차한 집안을 이끌어 가시며 3남 4녀를 두셨으나 첫 출산하실 때부터 몸이 약하시고 편두통을 앓으시면서 82세까지 살으셨으니 그래도 장수하신 셈이다. 누구의 어머니상이 인자하지 않을 리 없겠으나, 어머니는 정말 인자하시고 인정 많으신 분이셨다. 동네 이웃사람 누구에게나 인심 좋고 자정이 많으신 어른으로 소문이 나 있었으나 누가 이의를 말하리오. 

삼형제 중 형님 두 분이 먼저 가시는 것을 몸소 겪으셨고, 만년에 수원의 집에 오셔서 3년 동안 노령에 별로 자유롭게 기동도 못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유택으로 화성군 봉담면 당하리 산 23번지의 10에 모셨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인생고해의 흉흉한 파도에 시달리면서 자식을 기르며 한 평생을 마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일일까. 

특히 옛날의 한국여인의 고행은 유별하였는데, 그 한 많은 고난의 일생에서 그 무거운 짐을 짋어 지셨다가 그 책을 다하시고 이제 벗으셨으니, 부디 저 세상에서 편안하게 잠드시옵소서. 다시금 가신 어머니의 명복을 두 손 모아 비나이다. 

밥 굶기는 사감 

1966년 3월에 전부터 몇 번 사양하였으나, 이제 그 구실도 맥이 차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어 남자기숙사인 녹원사의 사감을 수락했다. 사감자리는 종래 선생님들이 일반적으로 즐겨하던 자리이며 더욱이 학생 중에서 꼽히는 자취위원은 상당히 수지가 맞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기숙사 운영에 문제가 많았다. 첫째 기숙사에서는 경영이 잘못되어 적자가 쌓여 은행에서 빚은 몇천 만원 내서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사비를 잘 안내는 습성이 생겨 이것이 굳어져 버렸다. 다른 학생이 안내 하는데 내가 먼저 왜내! 내가 내면 안내는 학생은 내 돈으로 먹게 되게! 

이와 같이 되니 날이 갈수록 적자가 늘어나게 마련이므로 따라서 자연히 식사의 질도 떨어질 수밖에 더 있겠는가? 안되겠다. 또 한 사람의 사감인 김갑덕 선생님과 상의하여 학생의 사비납부를 독촉하기 시작했다. 1차 기한은 별 효과 없이 끝나고 납부기일을 연장하여 2차 납부 기한을 정했더니 약간의 효과가 보일 정도여서 한 번 더 납부 일을 연기하여 이번에는 강행키로 하였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밥을 퍼주는 학생, 취사하는 여자 종업원들은 학생의 협박을 이기지 못하므로 식사를 배식하는 곳에 사감이 버티고 서서 식권이 다된 학생에게는 아침밥을 주지 않았다. 그랬더니 야단이 났다. 그때는 지금보다는 그래도 교수란 권위무게가 훨씬 더 무거웠으니 망정이지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선생에게 덤벼드는 학생들이 몇 명 있었으나, 우리 사감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지나서 자취워원장이 와서 이번에도 안 되겠으니 한번만 더 납부기일은 연기하자고 애원한다. 우리들 사감이 완강하니 학생들의 압력이 자취위원으로 간 모양이나 나는 단연코 거절하였다. 
 

▲ 서울대 농대 조교수 시절 (1963.)

두 번씩이나 납부기일을 연기했는데, 여기서 물러서면 이제야 정말 종이호랑이가 된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낮 점심시간이 되자 자취위원장이 도저히 못 견디겠던지 자의로 납부기일의 연기를 방송하여 발표하고 말았다. 

자취워원장을 불러 혼을 내주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찌할 수 없어 나는 일주일동안을 기숙사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식사중단 처방은 드디어 약발이 들기 시작하여 학기말에는 미납자가 10여명만이 겨우 남게 되었다.           

이왕 칼을 뺐으니 끝을 맺어야지. 마지막 처리를 위해 교수회의에서 제안을 하였다. 아직까지 식비를 내지 않은 학생은 방학이 시작되고 약 2주일까지 납부하지 않으면 1학기 학점을 무효화시킨다는 것을 교수 전원일치로 통과시키고 말았다. 원체 사정이 그러하니 이러한 터무니 없는 결의까지 통과된 것이다. 

그런데 납부기일이 되어 어지간히 다 냈으나 기간이 지나도 두 사람이 미납인데, 한 사람은 농교육학과 학생으로 생활이 어려워 우유배달까지 하고 있었고, 또 한 학생은 공교롭게도 내가 소속된 농화학과 학생이었다. 그때 그 명단을 교무과에 통보만 하면 1학기 성적이 무효로 되는 것이다. 일단은 그렇게 될 것이다. 

나중에 학생이 행정소송이나 걸어오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다. 결국 보고하지 못하고 말았다. 신학기가 되니 두 사람 다 같이 밀린 식비를 가져왔다. 이것으로 사비문제는 해결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이때까지는 감사제도가 없었는데, 돈 관계는 사감은 잘 알 수 없으니, 1년에 1~2번 감사를 하게 하였다. 정식 회계사는 경비가 너무 많이 들어 서무과로 하여금 1학기 중간쯤 가서 감사를 시켰더니, 별것 없다 한다. 그런데 2학기부터 시작하는 자취위원을 1학기 중에 뽑아놓았더니 그 중에 한 위원이 기숙사에 물건을 납부하는 업자한테서 약간의 용돈을 얻어 썼다는 것이다. 

당장 교수회의에 올려 무슨 처벌을 내려야겟는데, 그렇지 않아도 사비 미납과 배식중단 등으로 서로 감정이 험악한 판에 이런 것이 노출되면 무슨 사태가 날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성지 학생과장님께서 학생 본인에게 자진휴학 할 것을 종용하여 소리가 안 나게끔 일을 무난히 마무리 짓고 말았다.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기숙사 사생총회(舍生總會)가 열렸는데, 공기가 이상했다. 학생들의 비난 화살이 사주임에게 집중되는 것이었다. 방학 중에 새로 된 자취위원한테서 물건 납부업자에게 물품대금이 완전히 지불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바가 있으나 내 기억으로는 언제나 그 대금수표를 차질 없이 끊어주었고, 사주임을 믿는 까닭에 전혀 의심되지 않았는데,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는 것이라 생각이 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그 돈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야 될 판이다. 다음날 다시 서무과로 하여금 감사를 시켰다. 그 감사결과 물건 값으로 수표를 결재내서 주면 그것을 업자에게 주지 않고 중간에서 사주임이 당분간 유용해 썼다는 것이다. 즉시 물품납부업자를 불러 미지불분은 학교 기숙사에서는 지불한 것으로 하여 영수증을 받게 하고 그 사람과 사주임과의 개인관계 사비로 처리하였다. 

이와 같이 이 문제를 속히 개인관계로 전환시켰으니 망정이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업자는 사주임이었던 유용자에게 소송을 걸었다하니 후에 무슨 일이 생겼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을 그냥 두었더라면 기숙사의 장부가 압수될 뿐만 아니라 그 미지납금을 다시 지불해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러 가지 고비가 있기는 하였으나 사생들의 사비 납부도 정상화되었고, 은행빚도 갚았다. 
      
O O O

1966년 2월에 “콩고 오지 중의 Peptide에 관한 연구”라는 연구논문을 제출하여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66년 5월 30일에 넷째 딸인 정호가 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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