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공학과 설립되다 (33회)
  제5장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재직시절1

식품공학과 설립되다

1965년 경의 정부에서 추진한 농공추진 정책에 힘입어 옛날부터 농화학과에서 다투던 농산가공, 식품가공 분야를 따로 떼 내어 식품공학과를 설립하게 되었다. 

‘工’자가 붙어 있다하여 공과대학에 소속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론을 제기하는 자도 있었으나 이과의 공학과는 Engineering이 아니고 Technology라는 것과 식품원료가 농산물이니 농과대학에 소속되는 것이 마땅하고 외국에서도 농과대학에 설치되는 것이 상례라 하여 1967년 12월에 농과대학에 설치되었다. 

다음해인 1968년 2월 27일에 필자가 초대과장을 맡게 되었다 .사회가 농공추진을 부르짖는 시대이니만큼 신입지현생의 성적이 월등히 높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식품공학과가 새로 생겼으니 농화학과에서 하던 농산가공은 내가 가르치던 것이니 식품공학과로 가져오는 것은 당연하고 별 문제가 없었으나 종래 축산학과에서 강의하던 충산가공을 축산학과에서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장회의에서 이 과목은 당연히 식품공학과에 가져가야 한다고 정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며칠 후에 들으니 축산학과 학과장인 이승규 선생님이 책임을 진다하시며 사표를 내시는 등의 회오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나가서는 안 되겠구나 생각되어 축산가공과목은 양과에 양립시키기로 양보하고 축산과에 축산가공, 식품공학과에 축산식품가공 과목을 각각 설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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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화학회에서 학회지에 게재된 여러 논문을 심사하며 필자의 논문이 가장 우수하다하여 67년 4월 29일에 학술상을 받게 되었다. 

1967년 1학기에는 식품화학, 식품영양실험 및 농산가공1을 농화학과와 농교육과 4학년 학생에게, 그리고 농산제조를 농학과와 농교육과 3학년 학생에게 강의하였고, 대학원의 식품보존학도 담당하였다. 2학기에는 자연과학개론2를 1학년 1개반 학생에게, 그리고 영양화학, 농산가공1, 2 및 농산가공실습을 농화학과 4학년 학생에게 가르쳤다 . 

아버지의 별세

1967년 7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10살 되는 어리셨을 때 호탕하시나 유랑벽이 많으셔서 객지에만 다니셨던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셨으니 주로 할머니와 함께 가난하게 사셨다. 오로지 세력가로서 한학에 능하실 뿐 아니라 신학문도 상당하시어 성품이 대쪽같이 곧으시고 엄한 가정교육으로 7남매를 훌륭히 키우셨다. 

나중에 일가를 이끌어 영동에 오셔서 경제적 기반을 이루시고 필자를 고등교육까지 마치게 하였으나 말년에 형님 두 분을 먼저 떠나보내시기까지 하신 불우를 겪으셨다. 후에 수원에 오셔서 4년의 세월을 보내셨으나 자유로이 기동조차 못하시더니 83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 아버님과 어머님

그 당시의 세태가 아무리 그러하였다고 하나 요사이는 그 흔해빠진 관광여행 하나 제대로 가시게 하지도 못하였으니 이 불효의 한 어떻게 씻을 수 있으리! 어머니와 함께 화성군 봉담면 당하리의 같은 산소에 쌍분으로 모셨다. 

이제 소자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2남 4녀를 두었으나 다 같이 착하게 자라 대학교육까지 마쳤습니다. 막내딸 정호만 빼놓고 모두 좋은 배필을 맞이하여 어엿한 사회의 일원으로 자랐습니다. 하늘나라에 계실 아바지시여! 이 생애에서의 모든 한을 푸시고 고이 잠드시옵소서. 다시 한 번 두 손 모아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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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부터 상공부 특허국 외부 심사관으로 출원되는 특허출원 명세서의 교정 및 번역 그리고 심사 등에 많은 협조를 해왔는데 67년 5월 19일 발명의 날에 상공부장관으로부터 공업소유권공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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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학기에는 식품화학, 식품영양 실험 및 농산가공을 농화학과 4학년에게, 그리고 농산제조학 및 동 실험을 농화학과 3학년 학생에게 가르쳤고, 이밖에 대학원의 기기분석실험을 담당하였다. 2학기에는 자연과학개론으로 1학년 1개 반을 맡고, 영양화학, 농산가공2 및 동 실험을 농화학과 4학년 학생에게 가르쳤다. 이밖에 동국대학교 대학원에도 출강하였다. 

식품학계의 태두이신 은사 김호식 선생님께서 너무나 무리를 하시면서 제주도에 갔다오시더니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 입원치료를 하였으나 1968년 12월 3일에 작고하셨다. 

학생과장의 어려움

1968년 12월 28일에 도예학과의 표현구 교수가 제4대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표 학장과 이은진 선생이 나를 매산동에 있는 어떤 여관에 부르더니 학생과장을 맡아달란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는 것을 보더니 며칠 여유를 줄 터이니 잘 생각해서 맡아달란다. 

나는 생각하였다. 학생과장이면 학생의 규율을 잡는 직책이므로 학생에게 불미한 사건이 나면 앞장서 처벌을 주장하여 마치 일반재판에서 검사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조금 전에 농생물학과의 강수일 교수가 낸 학생 성적 중 학점이 안 나간 학생이 강 선생의 도장을 위조하여 찍은 성적을 교무과에 제출한 사건이 발각되어 문제가 되었다. 

이와 같은 것은 나로서는 단연코 퇴학 처리하는 것이 마땅한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날짜가 지나감에 따라 근신인가의 처벌로 그치고 말았다. 이러한 경우에 내가 학생과장이 되었을 때의 고민을 생각하고 기타 학생데모 문제가 시끄러울 때인지라 이것까지 생각해보니 그 어려움이 보통문제가 아니었다. 

교수는 연구와 강의를 하는 것이 본분이고 또한 새로 생긴 식품공학과의 초대 과장으로서 과를 잘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되어 결국 맡지 않았다. 그때 그 감투를 썼더라면 감투길에 들어서 적성으로 후에 더 높은 감투를 써보겠다고 왔다갔다 하면서 정력을 헛되게 소모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백번 잘한 일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 후 결국 의학과의 윤석봉 선생이 학생과장을 맡았는데, 몇 년 후에 작고하였으니 그의 명을 재촉한 원인 중의 하나로서 학생과장 감투가 아닌가 생각되어 미안하기도 하다. 

1969년 1학기에는 일반화학을 축산학과의 농교육과 1학년 학생에게, 식품화학, 식품영양실험 및 농산가공1을 농화학과 4학년 학생에게, 그리고 농상제조 및 동 실습을 농화학 3학년 학생에게 가르쳤다. 2학기에는 영양화학 및 농산가공2를 농화학과 4학년 학생에게 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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