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동에 집을 짓다 (34회)
  제5장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재직시절1

학회장의 선거 

1969년 4월에 전주에 있는 전북대학교에서 한국 농화학회 춘계 정기총회가 열리게 되었다. 이번 총회에서는 작년까지 회장을 맡고 계시던 김호식 선생님이 돌아가셨으므로 회장을 새로 뽑게 되었다. 그 뒷자리로 이춘녕 선생님이 맡으셔야 할 텐데 전적으로 안심되는 것은 아니었다. 

본인이신 이 선생님께서는 더 염려가 많으시고 혹시나 잘못되면 체면이 문제가 되는 판이다. 선생님도 옆에서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걱정이 대단하셨으므로 자연히 우리 학교 졸업생 회원도 평소보다 훨씬 많이 학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학회 총회가 시작되어 간사를 맡고 있는 필자가 사회를 보고 있는데, 회장 선출순서가 되었다, 그런데 회장선출방법을 토론하는 사이 그 방법으로써 몇 사람의 전형의원을 뽑아 거기에 일임하자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보통문제가 아니었다. 전형모임에서는 누가 어떤 사람을 선정 추천하면 그것을 반대하기는 어려운 법이니까 그렇게 되기 쉬우므로 전형 의원제도가 되면 이 선생님이 반드시 회장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급해졌다. 할 수 없이 사회를 보던 본인이 양해를 구하고 톤을 약간 높여 과거에 농화학회 회장은 학회에서 투표하여 뽑았지 전형위원제는 전례가 없다고 강하게 반발하고 말았다. 이것이 전기가 되어 결국 총회에서 투표를 하여 결국 이 선생님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그다음 부회장이 문제였다. 부회장도 회장과 같이 전체 회원이 무기명 투표를 하였는데, 심상칠 선생님이 선출되었다. 부회장은 지난해 김호식 선생님이 K대학교의 H교수가 되게 하겠다고 언질을 주었는데, H교수는 그 당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그렇게 되지 못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K대학교의 Y교수가 나를 다방에 불러서 하는 말이 이전의 언약을 안 지키면 다음부터 자기와 가까운 회원을 몇 트럭 싣고 오겠다 하며 협박에 가까운 불평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선생님을 회장으로 당선시키려니까 그렇게 되었으니 이해하라고 손발을 다하여 싹싹 빌 수밖에!

이와 같이 내가 괜히 앞장서서 힘을 내다가는 솟아나온 못이 먼저 맞는 격으로 인심 잃고 출세길 막히는 것 같다. 몸 사리자. 이리하여 모든 학회 일은 같은 과에 있는 이계조 선생에게 맡기고 물러서고 말았다. 

O O O

1970년 1학기에는 식품화학을 농화학과 3, 4학년과 식품공학과와 농가정학과 3학년 학생에게, 그리고 농산가공 및 식품영양 실험을 농화학과 4학년 학생에게 가르쳤다. 2학기에는 영양화학을 식품공학과 및 농화학과 3학년 학생에게 강의하였다. 
 
▲ 1966년의 필자 농학박사학위 수여식

고등동에 집을 짓다

1957년 겨울 서울에서 수원의 평동에 있는 학교 사택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 사택은 원래 선경직물의 사택을 학교의 후원회 돈으로 산 것으로 내가 들어간 집은 대지 59평에 건평 15평의 목조가옥이었고 별도로 99평의 밭이 붙어 있었다. 여기서 몇 년 살다가 학교에서 불하를 받아 내 소유로 되었다. 

1966년에 평동의 집은 선경직물에 팔고 1967년 초에 수원 역전의 매산로 1가 25번지의 3에 있는 대지 77평과 목조건물 약 25평 정도 되는 집을 농부의 은사이신 지영린 선생님으로부터 사서 이곳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집은 역 앞이니 교통은 편리하나 아이들의 교육에는 그다지 좋은 편이 못되어 장차 중요한 주택지대로 옮길 계획아래 이미 1966년 7월에 고등동 93번지 7소재 밭[田] 164평을 사들이고 이어서 그 다음해 67년 7월에 인접되어 있는 고등동 93번지 4소재 189평을 더 사서 합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0년 3월부터 고등동 93-4 현 주택이 있는 위치에 1층 27, 87평, 2층 17, 49평, 지하실 4, 6평인 총 49.9평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 집을 짓기 전에 임시로 역전의 한 건물을 헐어 그 재료로 고등동 93번지 7의 북쪽 편에 약 20평쯤 되는 목조건물을 7~8일간에 걸쳐 속성적으로 지어 일단 이사를 하였다. 

건축에 소요되는 자재는 내가 직접 사주고 건축업자는 공비를 받고 집을 짓는 일만 맡게 되었다. 그 당시 시멘트 1포대 값이 180원 하는 때이며 특수한 건축자재는 수원에서는 구입할 수 없거나 값이 비싸, 예를 들면 천장에 붙이는 텍스, 유리, 싱크대의 윗판 등은 일일이 서울에 가서 사가지고 와야 했다. 

그리고 그때 시판되는 시멘트벽돌은 시멘트를 너무 적게 넣어 경도가 약하다하여 집에서 사람을 사서 모래와 시멘트로 일일이 찍어서 사용하였다. 

그런데 건축업자의 선정이 잘못되었는지 집의 골조가 겨우 완성된 상태에서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내용인즉 집을 짓는 청부업자가 나한테 인건비를 받으면 일하는 인부들에게는 주지 않고 자기의 복잡한 사생활의 용도에 쓰고 마는 것이었다. 따라서 품삯을 못 받으니 일꾼이 나올 리 있겠는가? 이러한 중단상태가 2~3개월 경과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나머지 공사를 맡기려 해도 아무도 맡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요행이 친분이 있는 미장을 구하게 되어 처음의 청부업자와 함께 우여곡절 끝에 집 짓는 것을 완성시키게 되어 1970년 12월에 새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항간에 집을 짓게 되면 몇해 분을 한꺼번에 늙게 된다는 말은 헛된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이 집을 짓는 사이에 한 10년은 늙은 것 같았다. 학교에 가면 집의 일이 걱정이 되고, 집 짓는데 있으면 학교의 일이 마음에 걸려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더욱이 공사가 중단된 2~3개월 사이에는 초조와 고투의 나날을 보내게 되니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ㅣ. 

그 당시 건축비가 넉넉히 있는 것도 아니어서 건축비를 차질 없이 충당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큰 딸의 학교 등록비가 없어 사채를 내기도 하였다. 

완성된 집은 그래도 마음먹은 집이라 그 당시에 내가 사는 고등동 근방에서는 정원도 넓고하여 훌륭하고 잘 지은 집이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사회가 불안하여 정부에서는 만일의 경우 북한에서 도발을 해올 때를 대비하기 위하여 전과자들의 명부를 별도로 작성한다고 할때라 만약 사회질서가 무너졌을 때 다른 집보다 먼저 내 집에 쳐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조차 없지 않아 어떤 때는 후회조차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집을 지은 후에는 별 다른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6남매가 다 같이 잘 자라고 제반 가정사가 뜻대로 원만하게 이루어졌으니 행복한 보금자리의 구실을 충실히 해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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