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학회가 열리다 (37회)
  제6장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재직시절2

제주도에서 학회가 열리다

1975년 4월 6일에 한국 농화학회가 제주도에서 열리게 되었다. 비행기 등의 교통관계로 제주도에서 학회가 열리는 것은 아마 이때가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학회 회장이신 이춘녕 선생을 비롯하여 간부 일행이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명동입구에 있는 KAL빌딩에 모였는데 김포공항으로 떠날 시간이 되어서야 오늘은 일기관계로 비행기가 결항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일반 회원은 배편으로 가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이미 부산 또는 목포로 떠났다. 할 수 없다. 학회를 하루만 연기시켜놓고 그 당시 KAL 조중훈 사장의 매제이신 박태원 교수의 특별배려로서 간부 4명만 다음날 비행기표를 악속하고 나머지 간부고 배편으로 가기 위하여 밤차로 부산으로 내려가게 했다. 

다음날 일행이 직접 김포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출발하기 약 30분 전이 되어 또 결항이라고 방송하였다. 보통 일이 아니다. 많은 회원들이 어제 밤과 오늘 낮배로 제주도를 향해 항해 중일 것이고, 들리는 바로는 이것이 제주도에서의 첫 학회라 하여 도지사까지 솔선하여 많은 준비를 하고 기다린다고 한다. 

큰일이다. 더 연기할 수도 없고 잘못하다가는 학회가 유회될 판이다. 나는 생각하였다. 오후 5시에 부산에서 출발하는 배가 있다고 하니 최소한 이 배를 타야 하지만 내일 학회를 열수 있는데 지금이 11시니까 곧바로 자동차를 타고 급하게 달려야만 그 배를 탈까 말까이다. 

요사이 말로 머리를 좀 굴렸다. 그때는 차가 드문 때인데 마침 토지개발확대단장이신 김영섭 박사가 학회의 부회장이므로 함께 가기 위하여 차를 타고 나와 있었다. 안되겠다. 김 단장에게 가서 “저 차 부산까지 갈수 없 겠습니끼?” 하여 들어본즉 다시 김 단장님이 운전수와 상의하더니 가보잔다. 

회장 이춘녕 선생은 배는 타지 못하겠다고 하여 사양하시어 할 수 없이 김 단장님, 이계조 선생님과 필자 세  사람이 그 차에 즉시 승차하여 달리기 시작하였다. 마침 토지개발확대단에서 나온 직원이 있어 그에게 부산에 있는 지사에 배표 3장을 사놓도록 연락을 취하게 하였다. 

장거리를 뛸 준비를 하지 않고 나온 차이니 무섭게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하였다. 추풍령휴게소에서 선 채로 국수를 물과 함께 위속으로 흘려 넣고 다시 달렸다. 부산 입구에 닿으니 5시까지는 약 50분이 남았다. 도중에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워 부산지사에 연락을 한다. 아직 지사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아무도 모르니 전화로 위치를 확인하는 모양이다. 

또 다시 차가 달렸으나 시내가 되니 생각같이 빠르게 자가 가지 못한다. 5시 정각에 10분정도 남겨놓고 부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길가를 보니 자동차 2대가 서있었고, 눈이 뚫어지게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우리 차가 그 옆으로 가니 그 차가 떠나면서 손짓으로 따라오라 하며 앞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무조건 그 차를 따라가서 부두에 다다른 시간은 배가 출발하기 5분 전이었다. 

겨우 배를 타고 밤새도록 통통대고 가니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제주 부두에 닿게 되었다. 거기서 기다리는 학회관계 사람들도 어떻게나 초조하게 기다렸는지 모두 눈이 10리나 들어간 것 같이 보였다. 이리하여 이럭저럭 아슬아슬하기는 하였으나 제주도 여러분들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면서 학회를 무사히 치르게 되었다. 
 
▲ 농공이용연구소 겸직 연구관 발령장

제주도 사람은 한 집안 식구

제주도 한 여관에서 학회장에 가기 전에 일행이 로비에 모여 있을 때 제주도가 고향인 농화학과 학생 S군이 찾아와서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S군은 수일 전에 학교에서 열린 교수회의에서 그 며칠 전에 일어난 학생사건의 관련자로 경찰서에서 지명수배 되었고 그 처벌을 학장에게 일임한바 있었다. 

연유를 물으니 자기는 이번 사건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이라 경찰에서도 별다른 연락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S군에게 지명수배 되어 있는 사실과 학교처벌을 말하고 정말 아무런 관계가 없으면 속히 수원에 와서 사실을 경찰에 해명하라고 일러 주었다. 

제주도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나서 교수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서 학장께서는 전에 위임받은 학생처벌 사항을 그대로 집행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닌가. 필자가 이의를 제기하여 S군의 무관함을 환기시켰으나 학장은 경찰의 조사이므로 틀림없을 것이니 그대로 집행하겠다는 것이었다. 교수회의가 끝난 후에 다시 학장실에 가서 학장님께 재차 얘기를 하고 재고해주실 것을 간청하였다.

그리고 약 1주일이 지났다. 고재군 학생과장이 상의할 것이 있다하여 갔더니 그곳에 앉아 있는 신사 한분을 소개하면서 제주도의 S군과 같은 고향인 재일동포라는 것이었다. 내용인즉 S군 관계로 수원 갔다왔는데 수사과에서는 S군에 대해서 지명수배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일은 난처하게 터졌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학생과장을 별실로 불러 한 번의 것을 어떻게 처리했느냐고 물었더니 대답하는 말이 그때 내가 하도 고집을 부려 할 수 없이 S군을 명단에서 제외시키고 처벌처리 하였다 한다. 됐다 싶었다. 다시 그 신사를 만나 시침을 떼고 그러면 다 해결되었으니 안심하고 돌아가라고 했다. 

이 사건의 과정을 볼 때 첫째 정말 그대로 처벌을 했더라면 경찰말만 듣고 교수회의에서 처벌하였는데, 사실이 아니니 교수회의의 결의를 다시 번복하기도 난처하고 학교의 망신을 어떻게 면할 수 있었을까? 

두 번째로 제주도의 섬사람은 누구나가 한 가족 같이 한집안 식구같이 돕고 사는구나. 전에도 제주도가 고향인 y교수가 제주도 학생을 부탁하여 식품공학과로 전과를 시킨 일이 있는데, 이것도 같은 경우가 아닐까? 육지 같으면 친척이 아닌 바에야 누가 바쁜 세상에 그와 같이 남의 일에 발 벗고 열성을 다할 수 있겠는가? 

한집안 식구 이상으로 정이 두터운 제주도 사람의 상부상조하는 정신! 정말 알아주어야 할 지어다. 

O O O

이춘녕 선생님이 12월에 학장이 되셨다. 

1976년의 강의도 지난해와 대동소이하였으나 봄 4월이 되면 언제나 학생 데모 때문에 비상이 걸려 학생들을 데리고 소개 차 어디엔가 가기 마련인데, 나는 3학년을 데리고 공주에 갔다. 하룻밤 자고 난 뒤 몸이 불편한 김재근 선생의 2학년 인솔이 염려가 되어 3학년 학생은 공주에 그대로 둔 채 다시 수원에 와서 4월 12일 2학년을 데리고 민속촌을 구경시켰다. 

1976년 9월 12일에 맞딸 선호가 한양 조 씨 성환 군과 세종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77년 1월에 조성환 군과 조재선 선생의 박사학위논문을 심사통과시켜 2월에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케 하였다. 
 
1977년 이후에는 1학기에 식품공학과와 농교육과 4학년 1부 학생에게, 식품분석 실험을 식품공학과 4학년 학생에게, 그리고 농산가공학을 농학과 4학년 학생에게 강의하였다. 이밖에 대학원 학생에게 비타민학을 가르쳤다. 2학기에는 영양화학을 식품공학과 3학년에게, 농산식품가공2와 농산가공실습을 식품공학과 4학년에게 가르쳤다. 

이밖에 대학원에 식품검사법과 식품공학 실험2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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