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기의 학생 (40회)
  제6장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재직시절2

변혁기의 학생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 이후에 사회가 불안해지기 시작하여 각종 데모가 빈발하다가 급기야 4월 말에 들어가서 학생데모가 절정에 이르러 드디어 4월 28일부터 수원학생 전체가 들끓기 시작하였다. 

본관건물 복도에 학생들이 연좌하여 학장실을 둘러싸서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고 어용교수 물러가라고 외치면서 붉은 잠바를 입은 학생들이 학교 교문을 막아 우리들 교수조차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도대체 이 천지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할 수없이 교수들은 목장에 가서 모여 앉아 대세의 추이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신문에서는 목장을 동물사육장이라 하여 교수들은 학교를 쫓겨나 농대 동물사육장에 들어앉아 어쩌구 저쩌구 식으로 보도하니 이 기사를 보는 이로 하여금 더 한층 비참하게 보였을 것이다. 

사실 학생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어제까지 유순하던 학생들은 하나같이 눈빛이 변하여 교수들을 적대시 하는 태도로 바뀌고 말았다. 이때만은 유순하고 나를 따르던 학생이라 하여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학생들이 교수들의 출입을 막고 있는 정문 앞에서 일어난 일이다. 내가 그곳을 지나가다가 잠시 서서 그들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 때 조금 떨어져 지나가던 학생이 있었는데, 이 학생은 식품공학과의 모범 학생으로 유순하기 한이 없는 학생이었다. 나는 무심코 그 학생을 바라보았는데도, 그 학생은 나를 못 본체 앞을 보며 눈알만 이쪽을 보니 눈 속의 흰창만 보이는 기이한 모양을 하고 그대로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 광경을 보고 난 내 마음은 한없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이것으로 교육자인, 스승인 우리들에게는 설마 하는 기대는 여지없이 산산조각으로 깨지고 말았으니 무슨 낮짝으로 내가 교육자연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게도 느껴졌다. 

이전에 이북 또는 기타 국가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났을 때의 일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절친하던 인간관계, 주종관계에 있는 자 사이가 적대시 되는 과정이 뇌리에 떠오르게 되니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학생들의 변화된 작태를 볼 때 전율마저 느끼게 된다. 틀림없이 이런 식으로 하여 사회의 변혁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변혁을 약간이나마 맛보고 경험한 기분이 든다. 

하여튼 이때까지의 사제지간, 군사부일체 등등의 말은 물 건너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동시에 내가 일생 쌓아올렸던 돌무덤이 우수수 무너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와 같이 교육자로서 실망감을 경험한 적은 없었다. 

5월 17일 새벽 2시에 군인이 학교에 진주하여 이 상황은 끝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는 하였으나 서글픔 경험이었다. 

O O O

81년 1월에는 서울 강남의 어느 빌딩에서 하는 실바 씨의 마임드콘트롤 교육을 받기 시작하여 2월 14일까지 2주간 순호, 영호, 정호 세 딸을 함께 차에태워 매일 밤 그곳에 가서 수련을 받았는데 강사는 진준석 박사였다. 이것으로 새로운 정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 맞사위 조군 농학박사 취득기념 (1977. 2.)

김빠진 동기회 

81년 봄이 되어 5월  9일에는 오랜만에 청주농업학교 동창회가 청주에서 열렸다. 오랜만에 동기생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나 옛날을 되새길 수 있는 그립고 반가울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동기생들은 현역에 있는 사람은 몇 안 되고 대개 은퇴한 처지가 되어 그런지 대부분 시골의 촌로 행세를 하고 있어 경제적 능력도 별로 없는 듯 그다지 뜨겁게 서로 반기는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식사와 약간의 술을 할 정도로서 쉽게 헤어지니 뭔가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이 물론 나이가 들어 그런 탓도 있겠으나 그 전에도 이와 같은 감을 느꼈던 것을 생각할 때 이것은 지방적으로 조용한 성격의 탓이 아닌가도 생각되기고 한다. 그날과 같은 미지근한 동기회도 3년 정도 계속되더니 그 이후로는 아무 소식도 없다. 

O O O

동기회가 끝나고 아내와 함께 단양으로 달려 다음날 옛날부터 별러왔던 이름난 단양팔경으로 구경하였으나 특별히 안내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옛날부터 들어오던 기대에 너무나 못 미친 감이 없지 않았다. 고수동굴은 그래도 볼만하였고 오담3봉이 물 위에 삐쭉 나와 사진과 같았으나 별다른 느낌을 주지 못하였고 다른 곳도 별것 아니었다. 

가을이 되어 또 다시 학생데모가 나서 어수선한데 10월 18일에는 학생들이 강당 옥상까지 올라가 데모를 하였다. 

사위 조군이 미국에서 돌아오다

1982년이 되었다. 큰 사위 내외가 미국 텍사스대학에 연구 차 가 있는 것을 귀국하라 하였더니 3월 1일 온 가족이 돌아왔다. 원래 사위 조성환 군은 세종대학 식품공학과에 있었으나 2년 전 1980년에 미국에 연구차 가게끔 추진 중이었으나 1979년 10.26사태 이후에 사회가 불안하고 학생데모가 일어나 어수선하던 차에 그 학과의 C선생님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사퇴하여야 될 형편이 되었다. 

그래서 그 과에 조군과 다른 또 하나의 교수밖에 남지 않게 되어 미국행을 포기하였으나 다음 해 5월이 되어 5.17비상조치가 발동되자 학생데모가 중단되어 다시 그 학과의 C교수가 되돌아오게 되었다. 따라서 먼저 번에 추진 중이었다가 중지한 미국행을 다시 결심, 8월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휴직으로 떠나게 되었으나 떠나기 며칠 전 학교에서 불러 사표를 내든지 미국행을 단념하던지 한 가지를 택하라 하여 부득이 사표를 내고 떠났었다. 떠날 때는 2년 기한으로 연구하고 돌아오게 되어 있었으나 1년이 지나니 국내 학교의 교수 자리가 차차 메꾸어져 장차 들어갈 자리가 염려되었다. 그래서 1년 반 만에 돌아오게 하여 경상대학고 농과대학 식품가공학과 부교수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O O O

본인이 지도로 되어 있는 전남대학교 교수인 이종욱 선생의 박사논문을 심사하여 2월에 농학박사학위를 취득케 하였다. 

 
  자가용을 사다 (39회)
  손쉬운 장류제조법 (41회)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