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게꾼 나무장수 (8회)
  제1장 성장기

지게꾼 나무장수

집에서 6km 떨어진 길거리나 문골의 먼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녔다. 문골은 나룻배로 금강을 건너 강을 따라 동쪽으로 올라간다. 이곳에서도 높은 산에 올라야 좋은 땔감을 할 수 있다. 솔가지가 마른 삭정이는 가볍고 화력이 좋고, 참나무나 싸리나무는 마른 것이지만 무겁다. 

마른 나무를 하려면 나무에 기어올라 마른 가지를 꺾어야 한다. 도시락을 싸고 높은 산에 올라 땔나무를 하고, 가파른 산비탈을 내려올 때는 지게의 짐과 함께 구르면 크게 다치거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산 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기울이고 지게 작대기를 의지하여 옆으로 걸어 내려온다. 여차하면 지게와 내가 분리될 수 있도록 지게멜빵을 빨리 벗을 수 있게 어깨 가장자리에 비스듬히 걸치고 곡예하듯이 내려온다. 

개울가에 앉아 먹는 도시락은 꽁보리밥에 김치뿐이지만 꿀맛이다. 맞바람을 맞으며 금강강변을 걸어오려면 십자가를 진 예수의 골고다 산상에 오르는 고통이다. 짚신의 뒤꿈치는 이미 닳아 구멍이 나있다. 겨울이건만 입에 침이 마르고 등에는 땀이 흐른다. 

다음날은 옥천 장이 서는 날이다. 어제 해온 짐을 지고 다시 6km 떨어진 옥천장에 팔러간다. 나는 귀여운 꼬마이기에 그래도 잘 팔렸다. 만일 안 팔리면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도 없고, 둘 곳도 없어 큰 낭패다.

몇 푼이라도 벌어 중학교에 가려고 나는 그 고된 나무장사를 하였다. 어느 날인가 장작을 팔러갔다. UN이란 군표를 단 군인이 와서 나무를 둘러보고는 나를 보고는 선뜻 나무를 샀다. 집까지 져다 주었더니, 부인은 “이 꼬마가 나무를 팔러왔어? 불쌍한 것”하고는 나무 값의 배를 주었다. 고마워서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나무를 팔아 중학교를 가기는 어림도 없는 노릇이다. 그 당시는 장학제도도 없었다. 나는 나무장사도 하고, 미꾸라지도 잡아서 팔고 하였으나, 입학금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나무꾼인 나를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왜 그렇게 깔보고 업신여기고 하던지 서글프기만 하였다. 

기진맥진하여 나뭇짐을 진다. 악에 받친 나는 지게를 벗어놓고, 덤벼보았으나 상대는 나보다 세었다. 게다가 무거운 나무를 지고 맞바람과 싸우며 먼 길을 와서 거의 탈진상태였다. 나는 돌을 들고 석전을 벌였다. 나와 상대는 모두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 후에는 ‘무서운 아이’로 인정되어, 시비 거는 학생이 없어졌다.     

구두쇠 작은 아버지

아버지 삼형제 중 막내인 작은 아버지는 물려받은 유산이 있어 먹고살만하여 할머니도 모시고 살았다. 자식이 미우면 그 손자들도 밉다더니, 할머니는 장남의 자식인 우리들을 미워했다. ‘.......자기 자식이 못난 것을 왜 손자까지 미워할까......’

추석차례를 지내고 나면 할머니는 사과, 밤, 떡 등 맛있는 것을 사촌에게만 주고 우리에게는 본척만척 하였다. 나는 은근히 화가 났다. 어린 것이 오기는 살아서 밥도 먹지 않고 집으로 혼자 넘어왔다. 

숙부는 한쪽 다리가 약간 짧아 절룩거리며 걸었다. 그러니 몸소 힘든 농사 일을 못했다. 농사 일손이 모자라면 연필을 사 준다, 학습장을 사 준다 감언이설을 늘어놓고 우리들을 데려다가 농사일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공수표였다. 
 
▲ 지게가 주는 상징과 매력에 빠져 옛시절로 돌아간 필자

6.25 당시는 1등 도로가 모두 포장되지 않고 흙바닥이어서 군용차량이 많이 다니면 차가 지나간 바퀴부분이 움푹 파인다. 그래서 마을 단위, 가구 단위로 1등 도로를 할당하여 자갈을 도로 옆에 쌓게 하였다가 파진도로에 깔게 했다. 우리 마을은 동이에서 이원으로 넘어가는 구듬치재가 담당구역이었다. 파진 도로에 깔아 군용차량의 원활한 소통을 돕기 위함이다. 

이 부역에 동원되는 날이면 으레 숙부님이 오셨다. 또 감언이설로 꼬셔 우리집의 담당과 숙부의 담당을 위하여 나는 작은형과 부역에 나갔다. 나는 불만이 많아 숙부에 대하여 마구 불만을 늘어놓는다. 작은 형은 천성이 착하여 나를 구슬렀다. 나는 참으로 불행한 아이다. 가장 가까워야 할아버지, 숙부, 맏형을 미워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나와 작은 형은 위토답의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 천수답이기에 아래 논에 있는 못자리에 물을 대기 위하여 윗논에 있는 큰 샘에서 물을 퍼서 못자리에 대어주어야 했다. 맞두레의 양끝에 끈을 두 줄씩 매어 양쪽에서 잡고 샘물을 퍼서 밖에 쏟는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힘이 덜 든다. 물을 퍼내어 샘이 깊어지면 끈은 길어지고 허리는 더 굽혀야 하며, 힘이 빠진 내쪽에 맞두레의 물이 기울어 오면 더 무겁다. 

못자리 물이 마를까봐 쉴 새 없이 샘물을 바닥까지 푸면 으레 싸리나무로 만든 미꾸라지 발로 미꾸라지를 잡는다. 그런데 오늘은 미꾸라지 매운탕으로 영양보충을 하려니 하는 내 희망은 산산이 부서진다. 형은 이 미꾸라지를 수북리 할아버지에게 가서 팔고 눈깔사탕 하나로 실망한 나를 달랬다. 

우리 형제는 미꾸라지를 잡아 황약국에 자주 들렸다. 가용에 쓸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그때는 농약이 없던 때라 도랑에 붕어, 메기, 가물치, 피라미, 중태기가 많이 잡혔고, 금강에 가서 다슬기도 많이 잡았다. 지금도 옥천의 다슬기 요리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작은 형과 나는 여름방학 때 논에 물리 말라 샘물을 퍼서 논에 물을 대고 있었다. 

“형, 오늘은 중간소집일인데, 나 학교에 가야 해.”
“야 임마! 모가 말라죽는데 물을 퍼야지, 학교는 빠져라.”
“어떻게 반장이 학교를 빠지나?”
“임마! 잔말 말고 물이나 퍼.”
“에이, *팔. 나 학교 간다.”

맞두레를 내동댕이치고 학교로 달리기 시작했다. 2km쯤 뛰다가 결국 멱살을 잡혀 끌려오고 말았다. 형도 공부 잘하는 동생의 사정을 알지만 벼가 말라죽는 것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고향! 고향! 모두들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지만 나에게 고향에 대한 추억은 배고픔, 고생, 업신여김, 아버지, 숙부, 맏형 등 서글픈 기억뿐이다. 

대청댐이 건설되면서 많은 마을이 수몰지역이 되어 신촌(新村)이 새로 생겼고, 건너마을 안터의 큰 느티나무도 사라졌으며, 즐겨 목욕하던 금강도 대청댐으로 물이 깊어 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초가집은 하나도 없고, 모두 개량한옥에 기름보일러로 산다. 이제는 옛 모습이 하나도 없어 고향을 잃은 것 같은 허전함을 느낀다. 
 
어쩌다 고향에 가면 모르는 분들에게도 인사를 깍듯이 올려야 된다. 나는 모르지만 그 분들은 나를 다 알고 있다. 행여 결례를 하였다가는 “자식, 서울에 가서 출세했다고 으스대고 있어.” 비난의 소리가 들리게 마련이다. 특히 박사교수가 된 후에는 마을의 어른들을 찾아 뵙고 일일이 문안을 여쭈어야 한다. 

한번은 겨울방학 때 고향에 들리니 마을 어른들이 윷놀이를 하고 있다. 막걸리 몇 통을 사 드리니 모두 반겨 마신다. 사랑에 계신 노인들에게 응모가 사온 것이라고 가져다 드리니 칭찬이 자자하다. 적은 돈으로 이렇게 환영받기가 민망했다. 

 
  통학길에서의 석전(石戰)과 횃불싸움 (7회)
  지겨운 농사일 (9회)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