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동감리교회 (14회)
  제2장 내 믿음의 뿌리는 미아리였다

어느 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에 오니 아버지가 내 책보에 있는 교과서를 불태우고 있었다. 아버지는 교회를 다니느라 공부도 하지 않는 녀셕에게 이깟 책이 무슨 소용이냐며 화를 내셨다. 내가 울면서 아버지를 말리자, 그제야 아버지는 성적이 떨어지면 다시는 교회에 못나간다며 엄포를 놓았다. 

그런데 나는 학교에서도 성적이 꽤 우수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나의 학교 성적은 떨어지지 않았고, 도리어 점점 좋아졌다. 아버지로서도 더는 나를 말릴 수 없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교회를 다니는 것을 묵인하셨다. 

우리 집에서는 둘째 형만 내가 교회를 다니는 것을 지원해주었다. 둘째형도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형님이 다니는 곳이 기독교 계열의 중앙대학교니까, 남다른 이해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교회 중등부에서 발간하는 <등불>이란 회지를 만드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가리방을 긁어서 만드는 <등불>을 제작하는 일에는 신문식, 함수자, 이양자, 엄기웅, 최경수, 이만자, 조인남, 지강희 등 중고등부 친구들과 선배들이 함께 했다. 

교회생활은 나날이 즐거웠다. 교회의 중고등부 학생들은 삼사십 명쯤 되었다. 나는 이들과 소풍을 가거나 등산을 가기도 했는데, 교회 일과 이들과의 교제가 있는 신앙생활은 내게 큰 기쁨이었다. 

비록 교회를 나가는 것에 대한 부모님의 반대가 있었지만 나는 나의 첫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간혹 교회에서 만난 여자친구들이 나를 보기 위해 우리 집에 올 때가 있었다. 안 그래도 교회가 연애당이라며 반대하는 아버지의 눈에 띄면 큰일 날 일이었다. 이때 여자친구들은 우리집 대문 밖에서 내 여동생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내 여동생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면 나는 얼른 대문 밖으로 뛰어나가곤 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는 동안 한 가지 근심이 생겼다. 이때가 중학생이었을 때다. 한참 친구들을 좋아하며 놀 때다보니, 늘 용돈이 부족했다. 교회에 조금이라도 헌금을 하고, 또 친구들과 빵집에서 빵이라도 먹으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집에서 내게 용돈을 넉넉하게 줄 형편도 아니었다. 

생각 끝에 나는 신문배달을 하기로 했다. 그때 대략 200부 정도 돌렸던 것 같다. 신문배달은 일년 정도 했다. 겨울이면 밤중에 찹쌀떡을 팔러 집집마다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길면 꼬리가 밟히기 마련이었다. 내가 신문배달을 한다는 사실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결국 우리 가족에게까지 소문이 났던 것이다. 집에 들킨 이후 신문 배달 일은 곧바로 접어야 했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교회친구들과 교제를 열심히 할뿐 아니라 학교생활도 열심히 했다. 웅변반이나 문예반 등 특별활동을 하며, 많은 친구와 교류를 하며 친분을 쌓았다. 그 친구들 중 홍성완, 이법경, 유문남, 강신황, 권웅구, 김관, 문희준, 최무대, 이일구, 이종호, 윤극노, 김문기, 박영배, 홍성룡, 남상언, 김주영, 윤병호, 이천구, 김용각, 박신호, 당윤, 남궁명, 김창해, 남궁호, 안우진, 홍순승 등과 같은 친구들의 이름이 떠오른다. 
 
▲ 2022년 방영된 TV조선의 마이웨이 프로그램에서 미아동 시절을 얘기하는 박인수 성악가, 유잰건 전 국회의원, 필자 (박인수 성악가는 23년 2월 작고했다)

이 친구들에게 나는 교회에 같이 나가자며 전도를 했는데, 교회에 대해 잘 모르던 친구들도 나를 믿고 교회에 나오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아주 오래 전 일이다. 특히 고등학교 때 4인방이라 불린 최정선, 최무대, 김관과 나는 최근까지도 만나 옛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런데 지난 8월에 최무대가 먼저 암으로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고등학교 시절 만난 친구들 중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 둘 떠오른다. 그때 그 시절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육신의 친구는 가버리고 없다. 마치 빈가지에 찬바람이 불 듯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이다.   

그런데 내가 굳은 마음을 가지고 교회를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박경용 목사님을 비롯해 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만난 친구들이나 선배들도 내게 힘을 주었다. 교회 청년들과 함께 어울려 봉사활동도 하고, 야학을 했던 기억도 모두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교회에서 만난 친구와 선후배들은 내가 성장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아동 감리교회는 가난한 동네에 있어서인지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의 집안형편도 다 고만고만했다. 어려웠던 시절을 함께 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믿음으로 뭉칠 수 있었던 것 같다. 

미아동 감리교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 평생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준 이들이 많다. 성악가로 잘 알려진 박인수 형을 만난 것도 교회에서였다. 고등학교 1학년인 박인수 형을 교회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했던 박인수 형은 성가대에서 지휘를 맡았고, 교회일도 열심이었다. 게다가 여러 운동을 섭렵해 몸이 아주 좋았다. 간혹 여학생을 사귀기 위해 교회에 오는 아이들이 있으면 박인수 형이 나서서 혼을 내주었다. 

국제 변호사가 된 엄기웅 형은 고등부 학생회장을 맡았다. 공부도 잘하던 엄기웅 형은 모든 일에 빈틈이 없었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형이 했던 고등부 학생회장을 맡았기에 형은 나를 더욱 각별하게 챙겨줬다. 

조인남은 가난한 형편에도 어렵게 공부해 서울대학교에 수석으로 들어간 내 친구였다. 머리가 아주 좋은 친구였는데, 그는 자신의 공부만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와 함께 동네 공터에 천막을 치고, 우리보다 더 어려운 형편으로 공부를 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야학을 열기도 했다. 

그때 같이 야학을 하며 함께 지낸 친구들 중에 함수자, 박용준, 이양자, 김창자, 신문석, 권광중, 홍순길 형 등이 떠오른다. 이들은 내 마음 한구석에 늘 남아있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미아동 감리교회를 통해 만난 특별한 인연들이 다 떠오르지만, 그 중에서도 손꼽을 수 있는 사람은 박인수 형과 주일학교 때 내게 신앙을 심어준 유재건 형이다. 이들과는 지금까지도 만나는 귀한 인연을 쌓고 있다. 

특히 박인수 형은 성악가로 예술의 길을 걸었고, 유재건 형은 국회의원을 하며 정치인의 길을 걸었지만, 우리의 특별한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우리 세 사람은 미아동 감리교회 삼총사란 별명으로 불렸다.  

또 권광중(법무법인 광장 대표), 홍순길(전 항공대 총장) 또한 지금도 자주 만나고 있으며, 미래복지경영에 자문위원으로도 도움을 주고 있다. 박삼용 장로, 박세민 장로(박경용 목사님 집안)는 지금도 자주 뵙는 선배로 박인수 형과 동기이다. 대구에 살고 있는 이들은 나를 많이 도와주는 선배 장로이기도 하다. 또한 후배인 강원호 장로(단국대 교수), 이훈 장로 등도 변함없이 자주 연락하는 사람들이다. 

 
  미아리 제2의 고향 (1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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