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 중 두세 번 정도 의무실의 신세를 졌다. 처음 1~2주간 정신없이 몰아칠 때보다 나중에 일반 교육기간이 되어 정신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오니 아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9주째는 우리는 4주간의 병기교육에 들어가나 보병장교는 훈련을 2주를 그대로 더 받아 총 10주를 마치면 임관되는 동시에 일선으로 배치된다. 사람의 심리는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리고 이성도 한계가 있는가보다. 특수교육을 받지 않는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라도 고되고 무자비하게 고문 등을 당하면 대개 재사관 마음대로 조사서를 쓰게 된단다.
보병 장교 10주 교육을 마치면 일선에서 차가 와서 배출된 장교를 곧바로 부대로 태워 가는데 그때 분위기가 묘했다. 먼저 만났을 때 장 장래를 걱정하던 변 동문은 이제 지옥을 벗어나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한다. 병기장교라 하여 더 훈련을 받게 되는 우리들을 가엾게 여겨 진심으로 위로하면서 떠났고, 우리들도 병기장교고 무엇이고 생각할 여지없이 일찍이 이 지옥을 떠나는 보병장교를 진심으로 부러워하였다.
이럭저럭 1951년 1월이 되어 4주의 병기교육이 끝나가고 있다. 주로 차량, 폭약, 총포에 관한 교육이었다. 전선에서는 중공군이 참전하여 본격적인 격전이 벌어지고 있단다.
임관이 되면 어느 부대로 배속될 것인가? 병기장교는 최전방에는 배치되지는 않는다고는 하나 실제로 일선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들리는 말로는 병기학교가 별도로 분리되어 설립될 계획이 있다고는 하나 몇 번 의무실 신세를 졌으므로 내무 성적을 그다지 좋은 편이 못 된다 하여도 다른 성적은 괜찮은 편이고 나만 정식 4년제 대학을 나왔으니, 교관 요원으로 차출될 행운도 돌아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모두 각자 자기 나름대로 아전인수 격으로 생각이 많았다.
1951년 1월 27일 소위로 임관되면서 수도사단 병기부로 배치명령을 받았다.
이 지긋지긋한 훈련이 끝나니 이제 일선에 배속은 됐을망정 그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희열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하리라.
당시 수도사단은 동해안 전선의 최전방에 배치되어 있는데, 용맹하기로 이름난 부대라 한다. 그 사단장은 송요찬 장군으로서 전에 헌병사령관을 하시던 분으로 군기가 대단히 엄하여 군기에 저촉되기만 하면 단번에 총살이란다.
배속명령서를 보니 수도사단에 사흘 후에 도착하여야 한다. 이제 중공군이 개입했으니 불리하면 한국군이 일본이나 오키나와로 일단 철수할 수 있다. 그런데 배치된 부대가 서부전선이면 후퇴할 때 집에 들렀다 갈수 있으나 동해안은 그것도 어렵다. 집에 가보는 것도 이번 기회가 마지막일지 모를 일이다.
수도사단에 같이 가게 되어 있는 부산이 집인 허용오 소위에게 간청하였다. 허 소위만 먼저 가고 내가 늦게 가면 군기가 엄한 수도사단이니 잘못하면 큰일 날 것 같았다. 내가 간청을 하니 허 소위도 나하고 영동의 우리집에 같이 갔다가 부대에 같이 들어가는 것을 동의해 주었다.
|
|
| ▲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의 공격 / 강원도 횡성에서 중공군 나팔수가 신호를 울리는 가운데 병사들이 공격에 나서고 있다 |
|
급히 허 소위와 기차를 타고 영동에 와보니 집에는 아무도 없어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경북 상주에 피난 갔다는 것이다. 시간 여유가 없으므로 곧 떠나 상주에 가보니 큰형수님 친정 동네에 어떤 집에 온 가족이 함께 피난하고 있었다. 앞날이 어찌될 지 알 수 없으니 우선 한없이 반가웠다.
하룻밤을 가족과 함께 보내고 다음 날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머나먼 동해안으로 떠나게 되었다. 아마 이것이 마지막 일지도 모를 일이다. 노쇠하신 부모님 그리고 아내와 어린아이는 장차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가족과 작별할 때 아내가 눈물을 안 보이려고 눈물을 머금고 배웅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보이는 듯하다. 우리 가족의 장래에 행운이 있으라.
내가 떠난 후 아내는 아무도 보지 않는 부엌에 가서 이제 다시 보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는 남편인 나를 마지막 떠나 보내고 어린 것을 데리고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을 생각하며 한없이 울었다고 한다.
상주에서 포항을 거쳐 강구에서 죽변까지는 배를 타기도 하여 삼척에 가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군 트럭에 타고 험한 산길을 일선으로 일선으로 나아갔다. 차가 험한 산길을 달릴 때는 산속에서 공비가 습격해올지 모른다. 이제 나는 군인이니 공비의 목표물이 되었다. 이런 저런 상념이 끝없이 이어갔다.
삼척에 있는 수도사단 병기부대에 도착하여 병기부장인 여상연 소령에게 부임신고를 하니 즉시 묵호(지금의 동해시)에 가란다. 묵호에 사단 탄약보급소가 있으니 탄약소대장으로 그곳을 맡으란다.
폭격으로 파괴된 묵호 부대 뒤편 언덕에 자리 잡은 여러 집 중에서 제일 성한 집이 내 숙소가 되었다. 소대의 전체 사병을 모아놓고 부인인사를 하였다. “세상이 어지러워 여러분이나 나나 이역 전선에 와서 피차 고생을 하게 되었으니 서로 잘하되 여러분이 나로 하여금 직책을 잘 완수하게 하면 나 역시 여러분에게 잘 대하고 잘 보살펴 주리라.”였다.
아마 이 인사말을 듣고 병사들은 부처님 한분 오셨네 했을 것이다. 수도사단도 국군이 북진했을 때, 이북까지 갔다 왔으니 미국 해군 군함의 엄포사격 덕분에 부대 인원의 소모가 적어 전반적으로 사병의 계급이 높아 탄약소대에도 특무상사가 선임하사이고 일등하사가 향도였다.
특히 특무상사는 오래 군에 근무한 고참병으로서 아마 내 인사말을 듣고 그저 먹이가 하나 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다음날 나에게 오더니 하는 말이 탄약소대와 같이 원중대에서 멀리 떨어져 파견 나와 있을 때는 장교가 독단활용의 용단성을 보여야만 부하가 잘 따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도 해보지. 잘 알지는 못하나 독단활용이란 말은 들은 것도 같기도 하여 좋다하기에 그리 하겠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다음날 자기가 부산의 집에 갔다오겠다는 것이다. 출장명령이나 휴가증은 중대장이 내주는 것이므로 이것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임하사가 떠나고 난 다음 날 향도인 일등상사가 오더니 중대장의 허락도 없이 선임하사관을 보냈다가 중대장한테 들키면 어떻게 할려고 보냈느냐는 것이다. 독단활용인가 무엇인가를 하면 좋겠다고 하기에 그렇게 하였고, 기타 여러 가지 문제는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하였으니 별것이야 없겠지 하였으나 어쩐지 걱정이 되었다.
이것이 부하한테 당하기의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