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으로 맺어진 뜨거운 인연 (4...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우연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갑자기 만난 사이도 그 우연의 갈피를 비집고 들어가다 보면 어디에선가 필연적인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많은 사람 가운데서 단 한 번의 만남도 아주 소중한 것일진대, 수십 년에 걸쳐 만남을 가져온 것이라면 그것은 보통 인연이 아닌 것이다.

내가 신앙을 알게 되면서 만나온 인연들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소중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나환자들과의 만남은 내 인생의 소금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 나환자들은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다.

그들을 도우면서 나는 비로소 인생을 알게 되었다. 1974년부터 지금까지 30여년 간 나환자들을 돕는 운영위원으로 일하면서 나는 매달 넷 째주 주일만 되면 경기도 의왕시 라자로마을 성당미사에 참례한다,

<그대 있음에> 음악회 기획을 하면서 가까워진 이경재 신부님은 명동성당에서 나의 큰딸 결혼식 주례로 서주셨고,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장례미사도 주관하셨다. 또한 아홉 살 난 외아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장례미사를 주관하신 것은 물론이고, 개인적으로 나에게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씀을 해주셨다.

“가브리엘 님이 하도 원해서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내보내 아홉 살까지 기르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아들을 기르는 기쁨을 알게 한 후 다시 하느님이 거두어 가신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아들은 다시 하느님의 곁으로 돌아간 것뿐입니다.”

나는 이경재 신부님의 이 같은 말씀을 듣고 깊이 깨달은 것이 있었다. ‘슬픔’을 오히려 ‘기쁨’으로 돌려 해석하는 지혜가 거기 있었다. 비록 아들은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안타까워한다고 해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홉 살까지 만이라도 아들을 금이야 옥이야 키울 수 있게 해준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마땅한 일이다.

사실 나의 아내는 외아들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사람 만나는 것을 꺼려하고 한 때는 우울증으로 인하여 밝은 모습을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 후 아내도 이경재 신부님의 말씀을 가슴깊이 새기며, 그것을 위안으로 삼아 지금은 아주 안정된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다.

외아들의 죽음과 이경재 신부님의 위로는 내게 새롭게 신앙의 눈을 뜨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 뒤부터 나는 매주 성당에 빠지지 않고 다녔으며 나환자들을 위한 자선공연 사업도 더 적극적으로 펼쳐나갔다. 나는 소외된 이들에 대한 우선적 배려를 통해 모두가 아름다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복음의 문화화’ 또는 ‘문화의 복음화’라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라자로마을 돕기회에서 뜨거운 인연을 맺은 사람으로 봉두완 회장을 잊을 수 없다. 경복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문과 대학 1년 선배이기도 한 그는 천주교 교유이면서 30여 년 동안 라자로마을 돕기회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거의 한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이경재 신부님의 병세가 악화되고 있을 때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차기 회장에 대한 고민을 나누다가 나는 문득 봉두완 선배가 떠올랐다.

“신부님, 아무리 생각해도 신부님 마음에 드는 회장감은 봉두완 씨밖에 없는데 또 한 번 청을 드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 말에 이경재 신부님은 반색은 하면서도 매우 우려하는 눈빛이었다.

▲ <그대 있음에> 자선음악회를 마치고 수익금 전달식을 가졌다. / 왼쪽에서 두번째가 필자, 여덟번째가 이경재 신부, 아홉번째가 봉두완 회장

“글쎄, 한번 회장을 역임하였는데 본인이 응할지 모르겠네. 이종덕 위원장이 넌지시 부탁해보면 어떨까?”

“그럼 제가 일단 찾아뵙고 부탁의 말씀을 드릴테니 신부님이 일단 전화로 사정이야기를 해주십시오.”

이렇게 하여 나는 봉두완 선배를 찾아가 간곡히 청을 드렸고, 먼저 이경재 신부님의 전화를 받아 대강의 전말을 알고 있던 선배는 그 청을 받아들여 제7대 라자로마을돕기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때부터 봉두완 회장과 나는 다시 한 번 라자로마을돕기회를 활성화 시키는 굳은 의지를 갖고 열심히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러나 끝내 이경재 신부님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마음의 공허함은 물론, 라자로마을돕기회 사업도 전처럼 계속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다.

그때 마침 김화태 신부님이 부임하여 오셨는데, 그 분은 너무나 온화하고 합리적인 분이어서 카리스마가 있는 이경재 신부님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 후 수차례에 걸쳐 운영위원회를 통하여 만나는 동안 나는 김화태 신부님과도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한 봉두완 위원장과의 관계는 김화태 신부님의 부임 이후 더욱 돈독해져 라자로마을 돕기회가 어느 시기보다 활발하게 움직여 나가고 있다. 이렇게 하느님 사업과 봉사활동 사업으로 더욱 굳건해진 봉두완 회장과 나는 각종 모임에서 자주 만난다. 봉두완 회장은 그때마다 나를 좋게 평가할 뿐만 아니라, 나의 선배이자 삶의 동반자로서 지금까지 꾸준한 지도를 해주고 있다.

현재 라자로마을 돕기회 운영위원은 총 35명인데, 나는 15년 전부터 운영위원장으로 일해오고 있다. 5년 전에 이경재 신부님이 돌아가신 후부터 김화태 신부님이 성 라자로마을 원장 신부님이 되셨는데, 그때부터 <그대 있음에> 공연 성악가들에게 소정의 출연료도 줄수 있을 정도로 음악회가 정착되었다.

지금까지 라자로마을 돕기회에 관여해오면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일은, 2003년 여름 어느 날 라자로마을 성당에서 열린 젊은 신부의 미사집전이었다. 나는 감회어린 심경으로 유심히 귀를 기울였다. 옛날 이경재 신부님의 복사로 있었던 그 어린이가 지난 여름 서품을 받고 제일 먼저 찾아온 곳이 성 라자로마을 성당이었고, 그곳에서 첫 미사 집전이 열린 것이다.

그 분은 아랫마을 나환우의 자손으로 태어나신 후 신부가 되었으니,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사 진행 순간 결국 눈물로 전 신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던 것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