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유에 이어 문수를 잃고 윤회를...

전국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정부에서는 전시 연합대학을 설립하였다. 학생이 소속한 대학이 무엇이든 자기가 거주하는 고장에 있는 연합대학에 가서 강의를 듣고 학점을 따면 되도록 한 것이다. 서울대학교가 부산 대신동에 옮겨와 있었으므로 이 대학의 가건물이 이 지방의 연합대학이 되었다. 나는 여기에 나가서 강의를 하였고 내가 받는 것은 강사료 뿐이고 내 봉급은 대구에 있는 고려대학교에서 받았다.

1년이 지나가 1952년이 되었고, 이선은 아들을 낳았다. 대유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우리들에게 다시 아들이 생겨났다는 것은 여간 기쁜 일이 아니었다. 생김새가 수려하였으므로 문수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이 아이도 생후 40일 만에 죽었다. 대유와 똑같은 병으로 죽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일종의 윤회를 생각하였다. 부모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 두 아들이 차례로 태어났다가 죽은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 하였다. 이때부터 우리 내외는 절을 자주 찾았고 이 무렵 부터 나는 불교서적을 다시 읽기 시작하였다. 우리들의 머리 속에 있는 대유상(大有像) 속에는 대유와 문수가 하나로 되어 있었고 우리들은 이 비밀을 알아내기 위한 일념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이 무렵에 나는 매우 고달픈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월요일에 대구로 올라가 고려대학교의 강의를 하고 수요일에는 부산에 내려와 서울대학교에서 강의를 하였는데 전쟁 중이라 민간열차를 제때에 탄다는 것은 여간 힘 드는 일이 아니었다. 오후 4시에 대구역을 떠나기로 되어 있는 열차가 오전 3시가 되어야 겨우 떠나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는 정거장 앞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기차가 떠나는 시간을 무한정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군용열차가 우선적으로 통과해야 하고 민간열차는 그 사이를 보아 가면서 운용해야 하였으므로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또한 열차 안에서 좌석을 잡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고 대개는 승강구의 난간을 잡고서 매달려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밖의 찬바람을 이겨내기 위하여 항상 소주 한 병을 사서 병채로 마시면서 난간에 매달려 갔는데 저녁 해가 떨어지는 광경을 보면서 갈 때에는 대유를 생각하며 눈물도 흘렸고 때로는 슬픔에 가득 찬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죽은 자식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기막힌 심정은 당해 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활을 오랫동안 계속하다가 보니 나의 건강은 조금씩 나빠져 갔다.


▲ 유기천 교수 (1915 - 1998)/ 훗날 서울대 총장을 지냈다 [사진출처 : 서울대 홈페이지]

서울대학교의 법과대학장으로 계시던 이선근씨가 육군 준장이 되어 국방부에 나가 계셨으므로 법과대학의 학장직은 유기천 교수가 맡게 되었다. 하루는 그가 나에게 쌀 배급을 탈수 있도록 해줄 터이니 이력서 한 장을 써 달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 국가 공무원에게는 쌀 배급을 주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그의 말대로 이력서를 써주었다.

그는 며칠 후 1월 3일자로 씌어 진 법과대학 조교수 발령장을 나에게 주었다. 고려대학교에서는 부교수인 나를 이같이 조교수로 격하시킨 것이 기분에 좀 거슬리기는 하였으나 이미 발령이 난 것이라 그대로 받았다. 유기천 씨와 나는 나중에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는 사이가 되었고 이번의 조교수 발령에서도 그의 기질이 들어난 것이지만 그러나 처음에 나를 나의 모교인 서울대학교로 끌어 준 사람이 바로 그 유기천 씨였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칼 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튼 이것으로 나는 고려대학과 서울대학교 그리고 해군의 세 군데에서 봉급을 받게 되었다. 매주 대구에 다녀와야 했고 또 대유의 죽음을 슬퍼하는 가운데도 한편 봉급은 많이 받게 되었으니 생계는 좀 넉넉하게 되었다. 나는 거의 매일 술을 마셔댔고 술 상대는 주로 한태연 교수였다.

이 때에 나는 변경걸 사장의 요청으로 법학입문 책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한때 낙양(한양)의 지가(종이값)를 올렸다고 평판을 받을 만큼 학생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았다. 이 책이 그처럼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심정이 나름대로의 인생관, 사회철학으로 표현되어 읽는 사람에게 그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도록 유도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책은 인기리에 잘 팔렸고 수입도 따라서 많아졌다. 그리고 이 책의 제작 과정에서 인쇄소를 출입하는 동안에 나는 김성한 씨를 알게 되었다. 함경도 출신으로 동경 제국대학을 나온 그 분은 피난살이를 하면서 인쇄소에 근무하고 계셨다. 이미 다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김 선생은 나중에 우리나라 문단의 거두로서 그 이름을 떨친 분이다.

하루는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이 나에게 종이 한 장을 주면서 이것은 미국에 가있는 우리 해군무관이 보내온 것인데 국제법에 관한 것 같으니 황 교수가 공부해 보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페루 대통령의 인접해양 200해리 까지를 그 나라의 전관수역으로 삼는 다는 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국제법에 의하면 영해는 3마일에 국한되어 있고 그 밖은 공해로 되어 있는데 공해에서는 어떤 나라도 주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페루 대통령은 인접해안 즉, 소위 대륙붕에 있는 막대한 자연 자원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를 전관수역으로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선언은 나중에 미국의 압력으로 흐지부지된 모양이지만 나도 처음에는 이 선언이 국제법상 용납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손제독이 준 종이를 한번 읽어 보고는 그대로 묵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