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남편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불덩이 같은 몸으로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웬일이냐고 묻자 감기 걸린 것 같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 번도 아프다고 누워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걱정이 되어 “어디 배 좀 만져 봐요.” 하니 배를 손으로 가리면서 괜찮다고 손사래를 친다.
저녁도 안 먹겠다고 하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나는 불안하여 배를 보자고 하며 진찰하였다. 복부는 팽창되어 있었고 반사성 압통까지 있었다. 급성 충수염이 의심되어 당장 응급실에 가자고 했다. 남편은 “조금 기다려 봐.” 하며 버티고 있었다. 난 불안한 나머지 군 복무 중인 아들에게 전화 걸어 아버지가 충수염 같은데 고집을 부리고 응급실에 가지 않는다고 하소연을 하였다.
1시간 후 길 건너 사는 며느리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내과 전문의가 된 며느리가 조심스럽게 “아버님, 배 좀 보여 주세요.” 하니 그렇게도 거부하던 남편도 걱정이 되었는지 며느리가 진찰할 수 있도록 배를 보여 주었다.
“아버님 얼른 응급실에 가셔야 해요. 고열도 있고 복부가 많이 팽창되어 혹시 복막염인지 모르겠어요.”
며느리의 말에 남편은 그제야 일어나 응급실 갈 준비를 하였다. 아들은 양평에서 곧바로 병원으로 가겠다며 빨리 응급실로 가라고 하였다. 내 말은 무시하고 며느리 진찰에 벌떡 일어나는 남편이 얄미워 핀잔을 주며 응급실로 향하였다.
그때가 밤 11시, 복부 CT 촬영, 혈액검사를 한 결과 아들은 씩 웃으며 “축 맹장!” 하고 그나마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입원실에 들어왔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불안한지. ‘환자 보호자의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실감하였다. 다음 날 아침 7시에 수술을 시작하였는데 간단하다는 수술이 2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30분이 더 지난 후, 회복실로 간다고 전광판에 떴다.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수술이 오래 걸린 이유는 우측 하복부에 있어야 할 맹장이 우측 상복부의 간 뒤쪽에 있었으며 터져서 복막염이 되었다고 하였다. 본인은 우측 하복부의 통증이 아니고 상복부의 통증이라 다른 병을 생각했다고 한다. 의사가 복막염이 되도록 맹장 터진 줄 몰랐다니 실소를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급작스런 남편의 복막염에 이은 교통사고 액운에
'오늘 하루는 무사할까'라는 마음으로 '오늘의 운세'에 호기심과 재미...
불안한 현대인들, 스피노자같은 강한 자아를 찾아야"
다음날 나는 모교 의과대학 동창회 총회가 있어 롯데호텔로 가야 했다. 남편 옆에서 간호해 주지 못하는 죄책감에 잠시 병원에 들렀다가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교통이 너무 막혀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하였다. 중학교 동창인 영부인이 참석하는데 늦어질까 봐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을지로 입구에서 앞차를 따라 급히 우회전하는데 “꽝!”하는 소리와 함께 정신이 아찔하였다. 건너편에서 좌회전하던 버스가 나의 차를 박은 것이다. 운전석 앞문이 찌그러져 문이 열리지 않았다.
나의 가슴은 쾅쾅 뛰기 시작하였고 동창회사무실에서는 언제 도착하느냐고 전화벨은 계속 울리고. 차 문이 열리지 않는데 교통순경은 무조건 내리라고 했다. 뒤쪽으로 차를 움직여 문을 열려고 하는데 또다시 “꽝!” 하고 뒤차를 박은 것이다. 그렇게 가까이 차가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겁도 나고 당황한 나머지 나는 남편과 보험회사에 연락하였다. 마침 병문안 온 둘째 아들이 “엄마 다친 데 없어요? 빨리 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안심을 시켰다. 누군가 나를 도와주기를 바라고 있는데 아들이 온다니 얼마나 반가운지. 결국, 아들이 온 뒤에 견인차는 돌아가고 찌그러진 차를 몰고 나를 호텔까지 데려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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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부부가 쌍둥이 아들 유치원 행사에서 함께 하고 있다. 연세대 심장내과 교수를 지낸 아버지에 이어 쌍둥이 작은 아들도 어느덧 장성해 인제의대 일산 백병원 심장내과 교수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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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지만 ‘교통사고’라는 변명을 늘어놓고 행사에는 무사히 참석하였다. 몸은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위로는 받았지만 최악의 이틀이었다.
그 후 악몽이 지워지지 않아 ‘오늘 하루 무사할까?’ 불안해하는데 우연히 신문에서 ‘오늘의 운세’를 보게 되었다. 호기심과 함께 ‘정말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지만, 점차 재미를 붙여 요즘은 아침마다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조심’이라는 글귀가 있으면 매사에 특히 주의하고 ‘뜻밖의 기분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면 은근히 기대한다. 완전히 믿지는 않지만, 예방 차원에서 확인하고 있다. 남편이 아팠던 날의 운세와 내가 교통사고 났던 날에는 어떤 글귀가 있었는지?
‘오늘의 운세’는 고산 엄창용이 1999년부터 13년간 조선일보에 연재하여 많은 직장인과 구독자로부터 관심을 받았으며 《자미두수(姿媚斗數)》 《십이지법(十二支法)》이라는 대표 저서가 있다. 《자미두수》란 고대 중국의 도인 진희이 선생이 기도하던 중 천기를 헤아려 창안한 별의 이치를 통해 인간과 세상의 흐름을 예언하는 성리학(星理學)이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인종, 토질, 시간이 다르다. 고산은 우리나라에 맞는 별의 이치를 파악하여 본인만의 고유한 학문을 재창조하여 한국의 《자미두수(姿媚斗數)》를 발간하였다. 《십이지법(十二支法)》은 전생, 십이지, 십이운성을 이해해야 알 수 있는 은근히 어려운 학문이며 동시에 같이 보면 만세력 없이 손바닥 하나만 가지고도 팔자 운, 그날의 일진, 시간까지도 운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십이지(十二支)는 중국 은나라에서 시작되어 한나라 중기에 이르러 방위나 시간에 대응하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십이운성이란 지구와 태양이 일정 경사도와 고정 좌표를 유지하면서 자전과 공전을 하는 과정에서 오행의 전기를 받은 인간이 생, 노, 병, 사에 대한 과정을 측정하는 학문이다.
고산은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어른이 되어 생활이 왜 저마다 달라지는가를 생각하면서 원리를 터득하였다고 한다. 오랜 경험과 사주팔자를 분석해본 결과 사주는 50%, 본인의 노력이 50%이고 어른이 되면 노력과 환경의 영향보다 배우자의 영향이 50% 차지한다고 하며 사주가 좋다고 다 잘 사는 건아니라고 한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의 대표작 《에티카》에는 자신이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서 ‘자신이 하는 것을 하고 사는가?’라는 명제와 함께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자아 성찰에 대한 강한 메시지가 있다.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할 일을 흔들림 없이 하는 인간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것이 철학이다’라고 한 스피노자는 철학은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인생에 대한 탐구라고 생각했다. 불안한 현대인들이 무모하게 역술가나 점술가를 찾아다니기보다 스피노자에게 의지하여 내면의 강한 자아를 찾아보는 것이 어떨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