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진(金晟鎭)’ 이라는 세 글자는 일제 시 대학예과(大學豫科) 시절(時節)부터 들어오던 낯익은 이름이다. 그러나 직접 뵙게 된 것은 해방 후이다. 해방이 되자 모교의 외과학 교수로서 우리들과 사제지간(師弟之間)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선생님의 강의는 우리들이 4학년 때, 즉 1946년에 처음 들었다. 재사(才士)이면서도 풍류인(風流人)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인 강의는 구수하기만 했다. 특히 수술 이야기가 나오면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까닭에 우리들에게 색다른 실감을 주기도 하였다.
종로구 서린동(瑞麟洞) 133번지의 ‘김성진(金晟塵) 외과의원(外科醫院)’은 유명하였다. 삼척동자(三尺童子)도 잘 알고 있는 정도였다. 심심치 않게 이곳을 방문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던 생각이 난다. 방문 때마다 근처 음식점으로 데리고 가서 풍류담(風流談)을 들려주시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향수를 느끼게 된다.
허 정(許 政)과도 내각시절에는 보건사회부장관으로 입각하여 특유한 실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을지로입구에 위치했던 보사부청사로 호출되어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 올릴 기회도 여러 차례 있었다. 당시 나는 보건정책(保健政策)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던 젊은이였기 때문에 아무 쓸모없는 존재였지만 선생님께서는 무던히도 아껴주셨다. 사람을 잘 쓸 줄 아는 용병술(用兵術)과 윗분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도 이때 배웠다.
내각에서는 발언권(發言權)이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모든 것이 그 명성 때문이었던 것은 물론이다. 박정희(朴正熙) 정권시절에 여당이었던 공화당(共和黨)에서 선생님을 모셔간 것도 명성 때문이었다고 해석된다. 처음에는 고사(固辭)하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쨌든 이때부터 정치인으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국회의원으로서 활동하기도 하였고 한때는 여당의 중앙위원회 의장으로서 막강한 위력을 과시하기도 하셨다. 중앙위의장 시절에 몇 차례 댁을 방문한 일이 있다. 통인동(通仁洞)이라고 생각되는데 방문할 때마다 문전성시(門前成市)였다. 그런 중에서도 반가이 맞이해 주셨다.
한번은 종로구에서 유진오(兪鎭午) 선배와 대결한 일이 있었다. 당시 유(兪)선배는 야당의 당수였고 정치 1번지라고 일컬어지는 종로구에서는 야당이 강세였기 때문에 반드시 승산(勝算)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두 분이 중학교 이래의 막역한 친구요, 쌍벽이라는 것은 천하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며 언론에서도 두 분의 관계를 대대적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어느 날 서린동(瑞麟洞) 병원(病院)으로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다음날 유세에서 쓸 내용을 구상해 보라는 분부이다. 가족계획(家族計劃) 등 몇 가지를 말씀 올린 것으로 기억된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선거가 끝난 후 원서동(苑西洞) 댁으로 찾아갔다. 표차(票差)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고 한탄하신다. 선거에 대비한 일의 하나가 낙산(駱山) 달동네에 상수도(上水道)를 설치한 일이었는데 당시 서울시 부시장이던 차일석(車一錫)씨가 앞장서서 도와 드렸던 것을 나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표수를 집계한 결과는 이 지역에서 지지표(支持票)가 겨우 15%였다는 것과 사람의 마음을 알고도 모르겠다고 털어 놓으면서 괴로워하시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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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배님들을 모시고 김성진 선생의 환국 환영연에서 / 왼쪽부터 김동익 선생, 윤일선 선생, 김두종 선생, 김성진 선생, 서병설 선생, 나세진 선생, 나(서울대 총장)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1981.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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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은 그 후에도 이어졌다. 감언(甘言)에 넘어가서 서린동 병원자리에 빌딩을 세웠는데 그 결과가 좋지 않아 결국 실패하고 만 것이다. 10년에 걸친 선생님의 미국생활(美國生活)이 이러한 불운의 탓이라고 해석하는 인사들도 있다. 그러나 선생님의 미국생활은 다른 사람이 따를 수 없는 일면을 보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내고 거의 매일 골프를 통해 건강을 향상시켰다는 것, 즉 심신양면(心身兩面)에서 큰 보람을 안겨준 생활이었다고 풀이된다.
한 번은 ‘홀인원’을 하신 일을 미국의 지방지(地方誌)가 보도한 일이 있었다. 당시의 사진과 기사를 보내 주셨다. 이때뿐만 아니라 다소라도 변화가 생기면 곧 서신(書信)을 주시곤 하였다. 선생님의 이러한 습관은 그 후에도 변함이 없다. 어디에 가시든 꼭 소식을 주신다.
미국에서 돌아오신 후 나는 서울대학교 본부에서 환영연(歡迎宴)을 마련한 바가 있었다. 당시 나는 서울대 총장이었다. 오래간만에 평소 그리워하던 선배님들을 함께 모셨다. 총장실에서 환담을 하고 상황실에서 서울대학교 소개영화를 상영(上映)해 올린 다음 교수회관에서 저녁을 대접하였다. 모든 분들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선생님을 중심으로 말의 꽃이 만발하였다. 아름다운 한때였다. 나는 돌아가신 선친이 찾아오신 것 같다고 심정을 술회(述懷)했다.
명문거족(名門巨族)의 후예이신 선생님으로부터는 그 기품(氣品)을 잘 감지할 수 있었다. 전형적인 선비로서의 인품을 읽을 수 있는가 하면 김좌진(金佐鎭) 장군이나 김두한(金斗漢) 의원과 같은 의협심(義俠心)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문인으로서 또한 음악인으로서 우리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시기도 했다. 서울의대 재미동창회 총회에서의 바이올린 연주가 후학(後學)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는 사실이 지금도 지적되고 있다. 나는 86년 7월에 전문지인 ‘주간 건강(週刊 健康)’의 요청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일이 있다.
‘김성진(金晟鎭)’이란 세 글자가 던져주는 체취(體臭)와 이미지를 의학계인사(醫學界人士)는 물론이고 의학과 관계없는 많은 분들도 잘 알고 있다. 한마디로 김성진(金晟鎭) 박사는 문자 그대로 다재다능(多才多能)한 의학인(醫學人)이요, 보기 드문 수재(秀才)이다. 외과의사(外科醫師)나 의학교육자(醫學敎育者)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때로는 문학인(文學人)으로서, 때로는 정치인(政治人)으로서, 때로는 풍류객(風流客)으로서의 김(金)박사의 자랑스럽고 멋있는 삶을 세인(世人)들은 숙지(熟知)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筆者)에게는 중학과 대학의 대선배이자 스승이신 까닭에 왠지 ‘박사(博士)’라고 부르기가 쑥스럽게 느껴져 여기서는 ‘선생(先生)님’이라고 호칭하기로 한다. 필자가 선생(先生)님의 성함을 안 것은 그 전부터였지만 공식석상에서 듣게 된 것은 일제 시(日帝 時)였던 대학예과시절(大學豫科時節)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