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용숙(奇龍肅) 선생_1 (144회)
  제17장 도움을 주신 분들1

교수나 학자 중에는 기인(奇人)이 많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러한 현상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기인(奇人)이라고 불리는 교수나 학자 중에 존경(尊敬)받는 분이 많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해방 후 나의 주위에서도 기인교수가 여러 분 계셨지만 기용숙 교수가 단연 으뜸가는 분으로 꼽힌다. 성이 기(奇)씨여서인지 기(奇)교수의 기행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같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나는 학교생활하는 동안 기(奇)선생님과 접촉이 많았고 함께 보내는 시간도 많았다. 선생님의 고집과 특이한 인품(人品)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기 선생님은 1929년에 구 경성의전을 졸업하시고 미생물학실의 조수로 일하시다가 32년부터 19년간 만주 대련(大連)에 있던 만주위생연구소(滿洲衛生硏究所)에서 근무하셨다. 해방 후 경의전 교수를 거쳐 서울의대 미생물학 교수로서 활약하셨으며 70년에는 정년과 더불어 모교의 명예교수로 지내셨다. 동시에 가톨릭의대 자문교수, 경희의대 연구교수로 교수생활을 계속하시다가 74년 10월 13일, 가톨릭의대 성모병원에서 운명하셨다.

기(奇)씨 성다운 의학계의 기인교수로서 선생님은 유감없는 생애를 보내셨고 수많은 일화도 남기셨다. 내가 처음으로 기(奇)선생님을 만나 뵙게 된 것은 53년 봄으로 생각된다. 당시 나는 미 제9군단 민사처병원장(民事處病院長)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병원은 51년 춘천에서 시작되었고 천막을 사용하였는데 다음해 포천으로 이동하여 퀀셋트를 사용하고 있을 때였다. 예고도 없이 한범석(韓凡錫) 선생과 기(奇)선생이 찾아오셨다. 한(韓)선생은 대학 4년 선배이시며 나를 미 제9군단 민사처병원으로 보내주신 분이다.
 
기(奇)선생은 처음 뵙는 분이어서 처음에는 어느 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옷차림도 초라했고 하여 한(韓)선배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 정도로 착각(錯覺)하였다. 그런데 한(韓)선배의 태도가 대단히 깍듯하였다. 내가 머뭇머뭇하니까 기(奇)선생님을 일부러 모셔 왔노라고 설명해 주신다. 한(韓)선배는 내가 기(奇)선생님을 잘 알고 있던 것으로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기(奇)선생께서 날카로운 질문을 하신다. 중부 전선(戰線)에서 만연하고 있는 질병들의 역학에 관한 내용이었다. 별로 연구된 것이 없어서 우물우물하니까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고 공부하라고 꾸짖으신다.

이렇게 하여 기(奇)선생님과의 인연이 맺어졌는데 56년에 모교에 돌아와서부터는 나도 모르게 교분이 두터워졌다. 다시 예방의학 교실과 미생물학 교실 사이에는 주 1회 정도로 좌담회가 있었다. 이 좌담회는 오래가지 못했다. 기(奇)선생님과 예방의학의 심상황(沈相煌) 선생님이 가끔 언성을 높이면서 충돌하곤 하셨다.
 
멋쩍은 듯이 서계시던 두 분은 그대로 각자의 방으로 가셨다. 다음날 아침 식당에서 만나게 되었다. 나는 두 분을 화해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합석을 시키는 것이 최상책이다. 어렵지 않게 성사되었다. 이제 두 분은 이 세상에 안 계시나 저 세상에서도 아마 옛날보다 훨씬 더 절친한 사이가 되어 계실 것으로 확신한다.

좌담회가 중단된 후에도 심심치 않게 전화 호출(電話 呼出)을 받았다. 대개 방과 후였는데 교수실로 찾아가 뵈면 캐비닛에서 소주와 땅콩을 꺼내놓으면서 잔을 권하신다. 그리고는 그의 특유한 인생철학(人生哲學)이 시작된다. 직접 말씀하실 수 있는 기회가 얼마쯤이라도 있었는데 한번은 공부 안하면 장래가 없다고 간곡한 편지를 주시기도 하였다.
 
▲ 기용숙 선생 (1905.-1974.) [사진출처 : 서울대 홈페이지]

기(奇)선생님은 평양고보 출신이신데 고보시절부터 독특한 존재를 과시하셨다고 한다. 동기생인 박원선(朴元善) 박사(연세대 교수)께서 고보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기도 하였다. 호기심(好奇心)과 탐구력(探究力)이 강해 상상을 초월한 기발한 질문을 던져 일본인 교사들을 깜짝 깜짝 놀라게 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콜레라 발생은 기(奇)선생님에게 언제나 실력 발휘의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평소에 기(奇)선생님께서는 콜레라 발생에 대비하여 장비를 준비하고 계셨다. 콜레라 균(菌) 검출(檢出)을 위한 기구로부터 신발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장비(裝備)를 갖추고 계셨다가 일이 터졌다하면 출동하시는 것이 하나의 낙이었다고 회상된다.

한때 보사부에는 방역위원회가 있었으며 나도 위원의 한 사람이었다. 한번은 위원회가 소집(召集)되었는데 학교일로 늦어졌다. 부랴부랴 택시를 집어타고 원남동 로터리를 지나려니까 기(奇)선생께서 걸어가시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택시를 세우고 타시라고 했더니 젊은 놈이 택시는 왜 타느냐고 꾸지람 하신다. 당시 보사부는 을지로 입고에 위치하고 있었다. 늦어서 그러니 빨리 타시라고 했지만 완강히 거절(拒絶)하신다. 택시에서 내려서 강제적으로 오르시도록 하였다. 보사부에 도착해 보니 이미 20분이나 지각하였으며 위원회는 진행 중에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인사를 올렸더니 다음부터는 버스를 타라고 일갈하신다.
 
69년 가을, 어느 날 오후였다. 당시 대학원 교무과장이던 나는 원장이시던 김계숙(金桂淑) 선생님을 뵙기 위해 대학원장실로 들어갔다. 김(金)원장님께서 반색을 하신다. 옆에 기(奇)선생님이 앉아 계시며 환등기로 슬라이드를 조작하고 계신 중이었다. ‘바이러스’가 뭔지를 알려드리는 중이라는 이야기셨다. 대학원장이 ‘바이러스’를 알아서 뭐하시겠느냐고 했더니 노발대발(怒發大發)하신다. ‘바이러스’도 모르는 대학원장이 있을 수가 있느냐는 논법(論法)이다.

철학을 전공하시는 김(金)선생님께서 하시던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난데없이 기(奇)선생님께서 환등기를 가지고 들어오시더니 ‘바이러스’가 뭣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왔다고 하시면서 설명을 잘 들어 보라고 하시더라는 것이다. 약 30분 동안 슬라이드를 통한 개인강의(個人講義)를 듣고 있었더니 머리가 아파지더라는 이야기다. 그러던 차에 내가 들어오니 구세주(救世主)가 나타난 것 같더라고 대소(大笑)하신다.

학생들은 예외 없이 선생님을 기(奇)박사라고 호칭하였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한번은 왜 나에게만 박사를 붙이냐고 화를 내신 일도 있었다. 어쨌든 선생님은 학생들에게도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이 틀림없다.

나는 동숭동(東崇洞) 옛 서울대 관사에서 사실 때 댁에 가기도 하였다. 대문짝은 사과 궤짝으로 땜질되었고 집안 내부는 엉망이었다. 사모님은 나와 대학동기인 김찬수(金燦洙) 형의 누님이었는데 월급봉투를 받아본 일이 없다고 넋두리하신다. 환갑 때 문하생(門下生)들이 선풍기를 한 대 가져왔기에 거실에 놓아두었더니 집에 돌아오신 선생께서 이것을 보시자마자 집어 던지셨다고도 말씀하신다. 그런가하면 가톨릭의대 자문교수로 계실 때에 월급이 너무 많으니 깎아 달라고 하셨다는 일화도 있다.

세상을 떠나신 후에 오히려 집안 형편이 나아졌다는 것이 중평이다. 돌아가신 10년 후에 장남인 정일(正一)군이 추모회를 열고 기념간행물도 출간하였다. 정일(正一)군은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정형외과 전문의가 된 후 대천(大川)에서 개업을 하였다. 추모회에 참석하고 정일(正一)군의 효도(孝道)에 감격하였다. 이 행사를 비롯하여 기(奇)선생님에 관련 되는 모든 일에 쏟고 있는 친척인 치과의사 기창덕(奇昌德)박사의 정성도 대단하다.

평생을 학문에 대한 집념으로 일관하시면서 소신(所信)을 굽히지 않으시던 선생님이 74년 10월 13일, 69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치셨다. 나는 10월 15일 서울의대 학장의 자격으로 다음과 같은 조사를 올렸다.

유명(幽明)을 달리한 이제 무엇을 말씀 올리겠습니까마는 서글프고 가슴 아픈 마음 달랠 길 없어 영전에 몇 마디를 바치고자 합니다.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날 오후에 우리 대학의 장우현(張友鉉)교수와 함께 입원실로 선생님을 찾아뵙던 일이 종말로 되고 말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얼마 전에는 하나님 곁으로 가시게 되어 있는 줄도 모르시고 면역학회(免疫學會)일을 걱정하시고 계셨습니다. 그 간의 고생스러웠던 일을 말씀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학문을 지키시고 학문과 더불어 사셨고 학문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학문하는 사람도 많고 연구하는 사람도 많으며 교육자도 많고 대학교수도 많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학문과 운명을 같이하고 최후의 일각까지 교육에 몸을 바친 분은 많지 않습니다. 가신 어른에게 실례되는 표현일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신념(信念)과 자신(自信)의 사나이’, ‘의지와 고집의 사나이’, 그리고 ‘학문과 철학의 사나이’라는 별칭을 가지셨던 선생님이야말로 우리들의 귀감이요,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존재였음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이제는 선생님과 겪은 여러 가지 일들이 한낱 ‘에피소드’로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콜레라’방역 때 앞으로의 전망을 놓고 논의하던 일, 뇌염방역(腦炎防疫)을 위한 기발한 대책, 인생을 토론하고 삶의 가치를 추구하던 일 등등이 주마등같이 앞을 스쳐갑니다. 얼마 전에 의학교육의 목적을 따지는 자리에서 꾸지람을 주시던 일이 이 세상에서는 또 다시 찾을 수 없는 추억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사실상 선생님과의 대화 속에는 언제고 인생철학이 스며있고 학문의 원리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또한 어느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독특한 경지를 스스로 개척해 나가셨던 것입니다.

이제 선생님의 독특한 경지를 이 세상에서는 다시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남기신 독특한 유훈(遺薰)과 유덕(遺德)은 언제고 우리들과 함께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이룩하신 금자탑은 길이길이 빛날 것입니다. 더욱이 그다지도 염려하시던 면역학(免疫學)은 이미 도약단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일생을 이 나라의 미생물학(微生物學)을 위해 바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정년이 되시기까지는 물론, 그 후에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서 후진양성을 위해 이바지하신 노력과 정신은 그 누구도 뒤따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수차에 걸쳐 대한 미생물학 회장을 역임하셨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학술원상(學術院賞)을 수상하는 한편 대한민국 국민훈장모란장을 비롯하여 수많은 감사장과 표창장을 받으신 바 있는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님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7월에는 대한면역학회를 창립하시고 초대회장으로 취임하시어 남모르는 수고를 하신 것이 선생님의 생명을 단축시킨 요인의 하나였음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고 애처롭기 짝이 없습니다.

선생님! 저 세상에서도 종전과 다름없이 우리들을 비추어 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곁에서 그렇게도 즐기시던 연구를 마음껏 계속하십시오. 그리하여 이 나라의 미생물학과 면역학(免疫學)에 큰 영광을 안겨주십시오.

이제 더 이상 긴 말씀은 올리지 않겠습니다. 이 세상의 일일랑 조금도 걱정 마시고 고이고이 잠드소서. 삼가 명복(冥福)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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