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結婚)-2 (35회)

중학교, 예과, 학부생활을 통하여 가장 절친한 친구의 한사람이 김정근(金正根) 형이다. 김형(金兄)과는 형제(兄弟) 이상으로 가깝게 지냈다. 효제동(孝悌洞)댁에 수없이 놀러가기도 하였고, 때로는 김포(金浦) 고향집에도 여러 차례 함께 가기도 하였다. 형은 일제시대의 거상(巨商)이셨던 김윤면(金潤冕) 선생의 6남이며 명근(命根), 광근(光根), 성근(成根), 형근(亨根), 인근(仁根)씨 등 쟁쟁한 형님들이 계셨다. 의대를 졸업한 후 김(金)형은 신경외과(神經外科)를 전공하였고 미국으로 건너가 '뉴햄프셔'주 하노바에서 10년 동안 착실하게 이 분야를 공부하였다. 어느 모로 보거나 우리나라에서는 손꼽히는 신경외과(神經外科)의 대가(大家)이다.

1944년 봄 어느 날 저녁, 그러니까 의학부(醫學部) 1학년 때이다. 학우들은 김(金)형의 함을 지고 을지로(乙支路) 6가에 소재하였던 경성(京城) 서비스 사저로 갔다. 여러 가지 구실을 붙여서 함을 내려놓지 않겠다고 떠들어댔다. 빙장어른이 되실 정형묵(鄭亨黙) 선생이 참다못하여 분노를 폭발시키셨다. 함을 내려놓지 말고 되돌아가라고 호통을 치셨다. 우리들 일행은 투덜거리며 되돌아섰다. 그러자 육중한 분이 나오더니 잘못 되었다고 하며 사과했다.

못 이긴체하며 현관으로 가서 함을 내려놓고 안내되는 대로 안으로 들어가 방을 하나 차지하였다. 이 육중한 분은 계속 미소 지으면서 정무묵(鄭無黙)이란 명함을 내놓았다. 그때만 해도 학부학생들은 명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쪽에서도 명함을 올렸다. 김(金)형의 빙장되실 분과는 사촌간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윽고 호화판 술상이 벌어지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서울의대를 졸업한 다음 해인 1948년 봄의 어느 날, 김(金)형이 찾아와서 규수를 소개하겠다고 했다. 서로 믿고 존중하던 처지인지라 김(金)형이 시키는 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규수를 만나보신 어머님과 누님께서도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 이렇게 하여 모든 것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드디어 48년 8월 8일에는 명륜동(明倫洞) 처가 사랑채에서 당시 의대학장이시던 이갑수(李甲洙) 선생의 주례로 약혼식이 거행되었다. 가족들과 학우들 외에 내빈으로 예방의학의 최희영(崔羲盈) 교수, 내과의 이정복(李正馥) 교수가 참석하였는데, 두 교수께서 주신 축사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해 10월 22일에 덕수궁 석조전(石造殿)에서 서울대 총장이셨던 장이욱(張利郁) 선생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李)학장과 박은혜(朴恩惠) 경기여고 교장선생의 축사는 인상적이었다. 당시에는 신혼여행 습관이 없었다. 집안잔치는 거의 한달 가까이 계속되었다. 학우들 전원이 참석하여 명륜동(明倫洞) 내정(內庭)에서 춤을 추고 밤을 새웠던 일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

▲ 덕수궁 석조전에서 거행되었던 결혼식 / 뒷줄 왼쪽부터 숙부님 내외, 부모님, 빙부모님, 앞줄 왼쪽부터 채종식 형, 박찬무 형, 우리내외, 함현극 양

후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빙장어른이 되시는 정무묵(鄭武黙) 선생께서 44년 봄에 을지로 김(金)형의 처가에서 교환한 나의 명함을 간직하고 계시면서 가끔 김(金)형에게 나에 관한 이야기를 물으셨다는 것이다. 아직 나이 어린 장녀(長女)이여서 기다리고 계시다가 19세가 되던 48년 봄에 형에게 결혼에 관한 부탁을 하셨던 것으로 듣고 있다. 빙장어른과 정형묵(鄭亨黙) 선생은 사촌간이시지만 형제 이상으로 우애가 돈독하셨고, 자녀들 역시 친형제 이상의 형제애를 지녔다.

결혼 당시 집사람은 숙명여대(淑明女大)에 재학 중이었는데, 재학 중 결혼불가라는 원칙을 무시하고 결혼한 것이다. 오늘날까지 남부럽지 않게 지내고 있지만 부모님들은 물론 처가의 형제 중에서도 세상을 떠난 분이 많은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결혼 후에는 명륜동 1가 36-18의 처가에서 지내다가 56년 9월에 삼선동(三仙洞) 5가 28-4의 자택으로 이사하였고 68년 10월에는 성북동(城北洞) 31-4에 자택을 신축하고 거주하였다. 이집의 건축은 빙장어른께서 맡으셨다. 그러다가 89년 9월 동부(東部) 이촌동(二村洞)에 있는 타워 맨션 801호실로 옮겨갔다.

성북동에서는 비교적 넓은 공간에서 생활하다가 아파트로 옮기게 되니 제일 문제되는 것이 이삿짐이었다. 아낌없이 남에게 양도해주면서 이삿짐을 꾸렸다. 그러던 중에 약혼(約婚) 서약문(誓約文)이 발견되었다. 하도 기이한 느낌이 들어서 다음에 그 내용을 적어본다.

전도다망(前途多望)한 조국(祖國)의 운명(運命)을 지고 우리 두 사람은 모든 원리(原理)에 '사랑'을 토태(土台)(삼고 모든 사태(事態)는 사회적(社會的)으로 인식(認識)하고 모든 문제(問題)는 협력(協力)으로 해결(解決)짓고 모든 그릇된 낭만(浪漫)과 감상(感傷)을 물리치며 젊은 세대(世代)를 상징(象徵)하는 참다운 가정(家庭)을 이루기를 기(期)하야 제선생(諸先生)과 선배(先輩), 동료(同僚), 친족(親族) 앞에서 이를 맹서(盟誓)하고 자(玆)에 약혼(約婚)함.

                      서기(西紀) 一九四八年八月八日
                           권 이 혁(權彛赫)
                           정 기 자(鄭冀子)

상당한 달필(達筆)인데 당시 예방의학교실의 주임교수이시던 최(崔)교수님의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