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정파를 초월한 중용의 길 그리고 탁원한 식견과 경륜
여당의 입장에 있건 야당의 처지에 있건, 그는 언제나 중용(中庸)의 길을 걸었다. 정치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미덕인 탁월한 식견과 경륜, 그리고 돈을 모르는 청렴성 때문에, 박 대통령 사후에도 누구나 그를 소중히 대하게 됐으며, 실력자들은 항상 필요에 의해서 그와 연합하거나 삼고초려(三顧草廬)하여 그를 영입함으로써 협력 관계를 이루곤 했다. 언제 어떤 입장에 있건, 그는 국리민복을 위한 대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기에, 50년 정치인생을 통틀어 스캔들에 휘말린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돈을 모으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심복을 두지 않았으니 측근들이 물의를 빚은 적도 없었다.
어쩌면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그를 국회의장으로 추대했을 때, 그는 대권 도전의 호기를 맞게 됐을 법도 하다. 두 대통령 모두 오래 마음에 두었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영삼 씨는 지도력의 부족과 갈팡질팡하는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자신이 바랐던 이수성과 이홍구 두 전직 총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그가 한사코 배재하려 했던 이회창 씨에게 대통령 후보 자리를 강탈당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는, 그의 심복이며 조직을 장악하고 있던 권노갑 씨가 이끄는 당료들이, 이인제(李仁濟) 후보 지지로 돌아섰을 때, 평생을 자기를 위해 바쳤다는 권 씨의 해외 추방을 시도하기도 하고, 교도소에 보내기도 하면서, 한사코 이인제를 배제하고 노무현 의원을 후계자로 선택한 것으로 관측되었다.
어떻게 부산시장 선거에서도 패배의 고배를 마신 노무현 씨가 김대중 대통령 의중의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당내 저항도 적지 않았지만, 김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김 대통령의 노무현 후계 결정 케이스는, 클린턴 대통령이 일찍 대통령 후보 자격을 확보해 놓았으나, 부통령 후보는 이번 케리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경우처럼, 전당대회가 박두할 때까지도 정하지 못하고 고민했다는 에피소드가 나의 뇌리에 스쳤다. 클린턴은 고어 상원의원이 성실한 정치인이며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한 친지의 말을 듣고, 주저 없이 고어를 부통령 후보로 정했다는 것이다. 상사에게 배신을 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절대 복종하는 심복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고 이런 경우 “배신하지 않는다”는 뜻은, 절대적 존경과 복종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찍이 근대적 정당의 기틀이 확립되고 당내 민주주의 제도가 확고부동 상태인 미국에서도 그렇다면, 아직도 정당의 근본 성격이 전근대적인 붕당(朋黨)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에서, 절대적인 복종을 후계자의 제1조건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버려야 할 폐습이긴 해도, 쉽게 사라질 수 없는 현실 정치 상황일 것이며, 그런 점을 누구보다도 재빨리 간취하고 행동한 노무현 씨는 대권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의장이 대통령 후보 대열에서 탈락한 절대적 조건
김영삼 대통령의 경우를 봐도, 일찍이 대통령의 꿈을 안은 그는 20대 초반이던 50년대의 부산 정치파동 당시부터 정계 진출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정계 거물인 장택상(張澤相) 총리에게 접근하여 비서가 되었으며, 그 후 권세의 추이를 쫓아, 이기붕(李起鵬), 조병옥(趙炳玉), 유진산(柳珍山)에게 차례로 접근, 그들의 절대적 신임을 얻고 민주당 구파의 상속자가 되어 대권을 향한 도전자가 될 수 있었다.
김대중 씨는 장면 씨를 통해 정계에 입문한 후, 그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순종의 대가로 민주당 신파의 후계자로 발판을 굳히게 됐다. 그와 같은 민주당 신파이며 관록이나 정당인으로서의 조직 실력이 앞섰다는, 전국학련위원장 출신의 소장파 거물이었던 이철승을 제치고, 민주당 신파의 유산을 상속받게 된 것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장면 박사를 대부(代父)로 하여, 가톨릭 신자가 될 정도로까지 적극적인 충성심을 발휘해 신임의 서열이 바뀐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충성경쟁에서 이철승은 김대중에게 패배했다고 보여진다.
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오랜 원한 관계를 심정적으로 청산했으나, 언론 특히 《조선일보》와의 원한 관계는 풀리지 않는다고 토로한 말이 보도된 적이 있다. 마침내 그가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에 대한 제재를 선언하고, 대규모의 세무사찰을 감행케 했을 때, 김 대통령과 정치행동을 같이하며 생사를 같이했던 심복들도 대부분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나, 어느 날 노무현 씨는 “나는 《조선일보》에 대한 선전 포고를 한다”고 기자들에게 밝혔다.
그 사건을 계기로 노무현 씨는 김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얻게 되었고, 그 후에 김 대통령은 노무현 씨로 기울어진 후계 구도를 결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자아내게 했다. 마치 클린턴이 “절대 배신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한마디에, 고어를 부통령 후보로 결정한 경우를 방불케 하는 예라고 하겠다. 김대중 대통령은 노무현 씨의 민주당 후보 당선을 위해 당시 대통령 후보를 결정할 전당 대회 대의원의 80%가 호남 쪽에 편재되어 있었으며, 그 대의원은 권노갑 씨 등 조직을 장악한 당료파의 영향 하에 있었다.
김 대통령의 강력한 지시에 따라, 이 전당대회 대의원 대신 갑작스럽게 당헌과 당규를 개정하여, 미국식 선거인단에 의한 후보 선출 방식을 채택하게 해서 정부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는 방식으로 선거인단을 구성케 하는 데 힘쓰는 한편, 당내의 거물 후보 경선자들이 차례로 원인 모를 사퇴를 하게 되어, 누고도 예상치 않았던 노무현 대통령 후보가 탄생한 것이라고 전해졌었다.
60년의 헌정사에 빛날 ‘행정부의 시녀’로부터의 해방
이 같은 경우를 생각할 때 이만섭을 국회의장으로 추대케 한 김영삼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은 이 의장을 어떤 눈으로 보았을까.
두 대통령은 옛날 국회의 타성 그대로 정부에서 추진하는 예산안이나 법률안의 국회통과를 위하여, 야당이 강력히 반대할 때마다, 종전의 방식대로 이른바 날치기 방식을 포함한 강행 처리를 지시했다. 바꾸어 말하면 국회는 대통령이 이끄는 행정부의 시녀라는 관점에서, 야당이 반대 하는 안건이라도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라는 뜻임이 분명했다.
이만섭 의장은 취임사를 통해서 “앞으로 날치기는 없다”고 선언,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그 날치기 배제 공약을 끝까지 관철했다. 또한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장이 당적을 이탈하고, 여야를 초월해서 중립화된 국회 운영을 하도록 제도화했다. 그처럼 민주주의의 기본 성립조건이라고 할 삼권분립의 토대를 확립하여 입법부의 위상을 드높인 공적은 이만섭 정치인생 50년의 많은 공적 중 가장 괄목할 만한 공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만섭 의장은 50년 만에 입법부의 권위와 독립성 확립을 성취시키느냐, 대통령 후보 자리를 얻기 위한 대통령의 뜻을 존중하는 길을 가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주저 없이 전자를 택한 것이다.
이만섭이 이 글에서 자신도 대통령의 꿈을 간직한 바 있었지만, 대통령이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아니면 엄두도 못 낼 일이라는 뜼의 체념을 한 대목이 눈에 띈다. 아마도 그것은 이만섭 정치인생 50년의 가장 큰 미련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웬만큼 힘을 얻은 정치인이라면 대권을 노리며 그 필수적 선행 조건인 돈 모으기에 혈안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그는 돈을 모으려고 욕심을 부린 적이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당(私黨) 만들기에 전념하거나 대통령이나 총재 같은 실권을 쥔 이들의 괘씸죄 보복을 각오하면서 소신에 따른 언행으로 일관한 것을 보면, 그의 마음속에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뜻이 전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만섭은, 이렇다 할 업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부질없는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이나 ‘과거 정산’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5년 임기를 허송한 대통령들보다, 입법부 본래의 독립성과 그 권능을 찾게 한 탁월한 업적 남긴 자신이, 훨씬 보람 있는 일을 했고 국가의 장래를 위해 크나큰 업적을 남겼다고 자부하고 있을 것이다.
저자는 오늘의 한국이 얼마나 험난한 시련을 극복하고 지난 정치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인가를 젊은 세대들에게 알리지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했다. 또한 어쩌면 변화무쌍했던 지난 반세기에 걸친 이 땅의 올바른 정치역정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자기 자신이 그 정치사 속에 녹아든 역사적 개인으로서 그가 걸어온 정치의 가시밭길을 더듬어 다시금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기회를 삼고자 했다고도 한다.
아무튼 재미있는 소설책처럼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이 책을, 정치에 뜻을 둔 이는 물로, 내일의 한국을 짊어지고 나갈 걺은 세대들에게 간곡히 일독하기를 권하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