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이 <정온모작품집>인데 회고록, 자전에세이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의아하게 생각하실 분들이 있겠으나, 이 작품집의 3분의 1정도 분량은 작가 정온모 선생의 일생이 ‘내가 걸어온 길’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일종의 약식 회고록으로 이름 붙일 수 있겠다.
단편소설 분량도 채 안 되어, ‘한 사람의 일생을 줄거리처럼 A4 10장 분량으로 정리할 수 있느냐’라고 지적될 수도 있겠으나 단편소설에서도 얼마든지 수백, 수천 년의 유장한 서사를 담아 낼 수 있는 것처럼 분량 못지 않게 어떻게 서사하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정온모 여사는 본란에 소개된 ‘전환의 시대를 넘어’ 회고록의 이승윤 선생과 부부사이이고, 기실 <정온모작품집>은 이승윤 선생의 회고록과 같이 기획, 출판된 것이다. 이 책이 나온 2011년은 이승윤 선생의 팔순이자, 부부가 결혼한 지 50주년이 되는 금혼의 해였다. 그 기념으로 이승윤 선생의 회고록과 정온모 여사의 작품집이 패키지로 출판된 것이다.
정온모 여사는 서예, 그림, 도예에 취미가 있었는데, 그 수준이 아마추어를 넘어 인사동 갤러리에서 몇 차례 전시회를 열만치 프로 작가 못지 않았다. 그 취미활동을 30여년 가까이 하다 보니 작품이 도합 50여점이 넘게 쌓였고 어떤 방식으로든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남편의 팔순과 부부 금혼기념으로 작품집을 낼 이벤트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렇지만 정작 정온모 여사는 소극적이었다. 그해 12월 결혼기념일에 맞추어 인사동 금호갤러리에서 출판기념회를 열기로 날짜를 잡아놓았지만 일이 진척이 안 되어 남편인 이승윤 선생이 굉장히 서두르고 채근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의 성격은 ‘화집’이다. 출판물로서 서예, 그림, 도자기작품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진으로 촬영하는 것이 중요했다. 여기서 왜곡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미화도 폄훼도 안 된다는 것이다. 사진이라는 것은 어떻게 촬영하느냐와 색보정 등 후반작업의 테크닉에 따라 실제와 얼마든지 다르게 표현될 수 있고 또한 인쇄과정에서의 조정과 퀄리티에 의해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 삶의 기록이든 작품의 기록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 사실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이 담보되지 못하면 그 기록은 죽은 기록이다. 그렇지만 누구든 작자(作者)는 회고록이건 작품집이건 실제보다 잘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이것을 출판기획자나 편집자는 중심을 잘 잡아주어야 하고, 그에 따라 책의 가치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처음 작품집을 내는 데는 소극적이었지만 정온모 여사도 출판과정에는 많은 애착을 기울였다. 특히 정온모 여사는 한 남자의 아내 이전에 이화여대 교수를 지낸 영문학도이면서 미학자의 면모를 지닌 분이었다. 그것이 창작의 열정으로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는 짐작으로, 작자의 삶을 천착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계룡산골인 공주에서 태어나 해방 전후에 청소년기를 보낸 정온모는 여성으로서는 드문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전도양양한 싹수를 보였다. 내가 걸어온 길에서의 청소년기를 보자.
‘어머니는 가정교육열이 투철하신 분으로 언니와 나에게 교육과 예의범절은 물론, 바느질 자수까지도 가르치셨다. 우리말 하기와 쓰기를 금지했던 일제 말기인 그때 집에서 한글 서예를 익히고 객지에 계신 아버지께 문안편지를 쓰도록 어머니는 늘 지필묵(紙筆墨)을 구비해 놓으셨다.’
가정환경, 특히 어머니의 가정교육이 정온모가 학문의 길을 걷는 상당한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거니와, 이것은 정온모의 일생의 밑자락이 되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물론 한 사람의 일생을 어느 하나의 요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전인수일수 있거니와 중고시절의 대목을 살펴보기로 한다.
‘공주여중 시절 나는 수줍고 말수 적은 소녀였지만 합창단원으로 무대에 서고 웅변대회에 나가는 등 활발한 과외활동을 하던 중 서울의 경기여고 4학년으로 전학했다. 한국 최고의 명문 여자고등학교인 경기여고에서 특히 당대 유명한 최고 여성 지성인이었던 박은혜 교장의 아침조례(朝禮) 훈시는 삶의 훌륭한 지침이 되었다.’
수줍고 말수 적은 소녀가 합창단원 활동과 웅변을 하며 사회성을 키웠다는 것은 주목할 대목이다. 학창시절 남 앞에 나서는 활동을 한다는 것은 리더십의 한 단초로 여겨질 만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이화여대 영문과에 입학한 정온모는 남달랐다.
‘재학시절 나는 낭만주의 시인 셸리(P. B. Shelly 1792-1822)의 <Ode to the West Wind(西風賦에 관한 고찰(考察)>이라는 연구논문을 발표하는 등 학업에 열중했다. 또한 학생을 대표하는 학도호국단장(지금의 총학생회장)으로서 이화여대를 대표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정온모는 이대 재학 중 연극반 활동으로 무대에 서기도 하고 이대학보와 영문학과 발행 <Ewha Voice>의 기자와 편집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문리대학 학예지 <녹원(綠苑)>의 제호를 짓고 글을 실으며 창간의 주역을 맡아 문학도의 꿈도 키웠다. 이때 문학평론가 이헌구(李軒九) 문리대학장과 시인 박두진(朴斗鎭) 선생은 정온모에게 문학가의 길을 권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이화여대에서 두각을 나타낸 정온모는 1956년 2월 졸업식에서는 수석졸업을 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계속 영문학을 공부하며 조교직도 맡았다. 그리고 1958년 영국의 낭만주의자 시인 존 키츠(John Keats 1795-1821)의 ‘송시(頌詩)에 대한 고찰(考察)’이라는 영문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1958년 미(美) 국무성 초청 교환교수 <스미스 먼트 프로그램(Smith Mundt Program)>에 선발되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대학까지만 보더라도 정온모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이 뛰어난 머리에 의한 것이라면 타고난 것이다. 앞서 유년기, 청소년기에서의 몇 가지 단초를 제시했지만, 이것은 하나의 추동력과 그것을 더욱 확대하는 기제는 될지언정 근본은 될 수 없다. 인권적으로는 사람을 우등과 열등으로 갈라서는 안 되지만 모든 동물은 타고난 우열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열을 머리로 평가한다는 것이 문제다. 사람은 각기 다르게 재주를 가지고 있다.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 운동을 못하고, 운동을 잘 하는 사람이 공부를 못하고, 바둑만 잘 두는 사람이 있고, 게임만 잘 하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인류는 사람의 능력과 권한을 학업의 결과로 정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운명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부부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위스콘신대에서 유학한 정온모는 적어도 인생 반절의 운명을 정하게 될 한 사람을 만난다. 그것은 남편 이승윤과의 만남이었고, 그럼으로써 훗날 학자로서의 길과 정치인 남편을 내조하는 아내의 길, 크게 두 개의 길을 걷는 기제가 된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결혼한 정온모 이승윤은 각각 이화여대와 연세대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자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이승윤이 정치의 길로 나서자 정온모도 교직을 떠나 이승윤을 헌신적으로 내조하는 삶을 산다. 그런 점에서 이 부부도 전통적 가부장제처럼 아내 정온모가 남편 이승윤을 위해 희생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꼭 그렇게 평가할 일이 아니다. 아내 정온모는 신문을 꼼꼼히 읽고 그날그날의 정치, 경제, 사회의 동향을 체크해서 남편 이승윤에게 조언을 해준다든지, 남편을 대신해 지역구 관리에 나선다든지 내조를 넘어 동지적 관계에 가까운 것이었다. 여자팔자 뒤웅박팔자라는 옛말이 있지만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는 거꾸로 남자도 해당되는 말이다.
유학에서의 그 만남으로 이승윤 정온모는 서로의 보완재가 되고 시너지를 일으켜 활짝 꽃을 피운 것으로 보이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밖에서 보는 제3자의 관점이고 그 평가는 본인들만이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정온모작품집. 이 책은 회고록이 아니라 정온모 여사가 창작한 서예, 그림, 도예 작품집이다. 정온모는 내가 걸어온 길 이렇게 적어 마무리 한다.
미(美)적인 것에 몰입, 전념한다는 것은 속(俗)되고 잡(雜)스러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 같다. 순수한 경지로 이끌어 주어 보다 세련되고 순화된 감성을 갖고, 품격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것이 바로 아름답고 참됨의 길 아닐까.
그리스의 미를 이상적인 것으로 묘사한 존 키츠(John Keats)의 ‘Ode on Grecian Urn(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송시)’의 마지막 명구(名句)를 인용하며 이 글의 끝을 맺으려 한다.
“Beauty is truth, truth beauty,” ― that is all Ye know on the earth, and all ye need to know.
“아름다움은 진리이고 진리는 아름다움이다,” ―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이리니 그대가 지상에서 알고 있고, 그대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이리니.
이 책은 화집으로 작품이미지가 최적으로 인쇄되어야 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일반 회고록에서 많이 쓰는 모조지 종류가 아닌 특수지에다 인화지 정도의 두께를 택했다. 표지 또한 흔히 하드커버로 부르는 양장으로 하고 천으로 감쌌다.
하나 아쉬운 점은 작자인 정온모 여사가 ISBN 취득과 배포를 원치 않았다는 점이다. 소박하게 그동안의 작품을 모아 책으로 내고 친지들과 공유하는 것으로 출판의 의미를 둔 것이다. 그러나 작자의 의사이니 출판사로서 존중한다.
정온모 작품집 | 투데이미디어출판사
by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