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텔레비전에서 보게되는 5, 60년대 영화를 보면, 스토리텔링 이전에 그 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거리의 풍경에서 버스나 택시, 지나는 사람들의 옷이나 신발을 보면 그 시대의 삶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 시대만해도 동영상을 통한 다큐멘터리 기록이 별로 없기 때문에, 배우들이 연기하는 허구의 스토리, 극영화이지만 시대상을 읽어내고 유추해낼 수 있는 것이다.
隨筆은 물론, 小說과 詩에도 시절의 풍경과 시대상이 녹아 있다. 문학은 그 시대의 언어를 통해 메시지화되겠지만, 지난 시절의 언어를 살려내고 미래 시대의 언어를 창조해내는 수고로움이 녹아 있어야 한다. 소설과 시의 본령을 따지고 든다면, 그것은 원석을 갈고 닦아 보석을 만들 듯 모국어를 빛내는 것 아니겠는가. 아름다운 모국어를 찾아내고, 그것을 엮어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고, 그리하여 아름다운 이야기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문학의 언어들이 시대에 따라 변화를 겪듯, 일상에서 소통(疏通)하는 도구로 쓰이는 우리의 말들은 시대가 흐르면서 어떤 말은 죽고 어떤 말들은 생겨나기도 한다. 시대가 흐르며 사어(死語)가 된 모국어는 여기서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겠지만, 예컨대 '내로남불'이라든가, 근자에 부동산이 심각한 문제가 되며 ‘영끌’이라는 결코 아름답지 못한 말이 생겨난 것도 시대가 소구한 모국어의 팔자라 하겠다.
― 시대 언어, 고어(古語)로 직조된 문장들
月田 장우성의 회고록 <화단풍상 70년>은 요즘에 쓰지 않는, 이미 사어가 된 아름다운 고어(古語)가 많다. 그런데 그 문체로 직조된 생경한 단어(고어)들이 이 시대에 읽힘에 있어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 작자가 일부러 고담준론(高談峻論)하듯 고어를 찾아 쓴 것이 아니라, 살아오면서 체득하고 써온 말을 자연스럽게 쓴 것이라 딱딱 들어맞는다. 그렇다. 회고록은 그 시절의, 언어를 오롯이 담아내는 그릇이다.
회고록은 그 시기에 일어난 일을 서술하는 '역사', 알려지지 않은 사건을 알리는 '뉴스'의 가치가 있다. 예컨대 20, 30년대 생에게 있어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은 살아오면서 겪은 최대의 역사적 사건일 테다. 이 세대들에게 있어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에 대한 트라우마를 뺀다면, 굳이 회고록을 써야 할 이유가 없을 정도가 될 것이다.
한국전쟁은 하나의 사건이지만, 수백만 사건이기도 하다. 수백만의 사람이 각기 겪은 한국전쟁은 그 각각의 관점에서 보면 수백만의 사건인 것이다. 갑돌이, 을돌이, 병돌이가 겪은 6.25가 같을 수 없다.(지금도 우리는 이 시대를 각자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머리에 저장하고 있다.) 수백만의 한국전쟁은 다 역사이고, 뉴스이고, 스토리이다. (생존해 계시는 20년대 생은 거의 없고, 앞으로 10년 정도가 흐르면 직접 겪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다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회고록이라는 기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상기해야 한다.)
― 2, 30년대생들의 트라우마,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장우성 선생이 겪는 한국전쟁 또한 또 하나의 역사이다. 서울대학교 미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한국전쟁을 맞아 좌우익 어느 한 편에 서야 하는 운명에 휘말려, 상황을 타개해나가는 과정에서 선생의 세계관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한편, 북한군이 퇴각할 때 자신을 서울대 미대 교수로 이끈 근원 김용준과의 마지막 장면은 역사의 아픔이 진하게 밀려온다. (근원은 사회주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고, 북한군이 퇴각할 때 월북했다.)
월전이 서술한 근원과의 마지막 만남을 보자.
"뜻밖에 미술대 학장직을 맡은 근원(김용준)이 날이 저무는 늦은 시간에 찾아왔다. 천만 뜻밖이었다. 근원은 방에 들어오더니 나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놀라워했다. 그러나 매우 겸연쩍은 기색으로 말없이 한참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뭔가 할 말이 있어 찾아온 것이 분명한데 내 몰골을 보고는 말문을 열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때 유엔군이 물밀 듯 다가오고 있고 인민군이 후퇴를 거듭해 전세가 역전, 일부 인민군은 서울에서 퇴각하고 있을 때라, 이 긴박한 시기에 근원이 무슨 경황에 나를 찾아 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나친 상상일지 모르나 근원은 막다른 골목에서 혹시 나와 어떤 선후책을 의논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 아닌지?
그때 근원은 병약한 부인과 열 살도 안 된 딸아이가 있어 엄동설한에 길을 나설 수 없을 때다. 나는 그 날의 쓸쓸했던 근원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이 길로 근원은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천상륙의 성공으로 아군이 북진을 하며 월전은 공군 종군화가로 전장을 누비게 된다. 여기서 종군일기의 한 대목을 보자. 담담히 표현한 포연 속의 평화로운 풍경이지만 글의 행간에서 눈물겹도록 그리운 서정으로 다가온다.
3월 23일(暖)
점촌(店村)에 와서 일박(一泊). 쾌청(快晴)에 따스한 날씨다. 마침 점촌 장날인 듯. 전화 속에서도 장이 섰다. 사람들은 생계를 위하여 결사적인가 보다. 장터를 돌아보며 생기를 느끼고, 봄씨앗과 더덕, 씨감자를 늘어놓은 노점 앞에서 나는 일말의 생의 환희 같은 것을 되찾았다.
나의 고향에도 봄은 왔으리라. 봄의 양광(陽光)을 받은 흙은 수분을 머금고 생명의 씨앗을 기다리려나....
이 고장은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롭기만 하다. 문 앞에 기대 선 한가한 아낙네. 뜨락에서 놀고 있는 조무래기들. 봄물이 넘쳐 흐르는 논두렁에 소 몰고 지나가는 촌로(村老). 이 모두가 평화로운 우리 농촌의 서정이 아니던가.... 아아, 평화가 그립다. 한 없이 그립다.
뭐니 뭐니 해도 월전 회고록의 미덕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의 화단풍경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화숙(畵塾)과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서화협회전 協展(협전)과 조선미술전람회 鮮展(선전)을 소상히 소개하여 화풍의 연원을 만날 수 있거니와, 청전 이상범에서부터 장발, 고희동, 영운 김용진, 의재 허백련, 근원 김용준, 손재형, 이응노, 김기창, 김환기, 김종영, 변관식, 이유태 등 당대의 거목들과 교유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놓고 있는데, 이는 한국 현대미술사로 관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월전의 회고록을 읽으면 한국의 현대미술사의 광맥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 한국 현대미술사를 관통하는 회고록의 한 典範
월전의 회고록 <화단풍상 70년>은 히스토리즈의 출판사인 투데이미디어에서 간행한 회고록은 아니다. <히스토리즈의 책들>은 투데이미디가 간행한 회고록을 소개하는 지면이 아니라, 우수한 회고록과 자전에세이를 소개하는 지면이다.
화단풍상 70년은 회고록으로서 사료적 가치, 뉴스적 가치, 거기다 서술로서 문학적 가치가 있는 회고록의 한 전범(典範)이라 할 만 하다.
이 회고록의 미덕을 하나 더 첨언하면 고담준론(高談峻論)같은 문체이지만 술술 읽힌다. 아마도 문장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일 터다.
한편, 출판으로서 이 책을 간단히 평가하자면 양장제본에 한지 같은 느낌을 주는 누런 표지가 화가의 회고록으로 컨셉도 어울리고, 내지의 편집도 심플하고 깔끔해서 익숙한 옛것을 대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화단풍상 70년 | 미술문화
by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