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후퇴-1 (49회)

1951년 1월 3일 오후, 살을 에이는 혹한 속에 식구들을 이끌고 피난길에 올랐다. 그때 한강은 인도가 끊겨 큰 드럼통을 엮어 강에 띄우고 그 위에 판자쪽을 놓아 가교를 만들어 건너 다녔다.

우리 식구들은 매서운 강바람을 받으며 어둠이 깔릴 무렵 한강을 건너 영등포에 있는 친지 철농 이기우(鐵農李基雨)의 집을 찾아갔다. 철농은 공군에서 제대, 제일방직 계장으로 사택에 들어 있었다. 잠잘 곳도 막연할 뿐만 아니라 춥고 날은 저물어 우선 철농에게 신세를 지기로 한 것이다.

혼란 중이었지만 철농은 우리 식구들을 환대, 하룻밤을 편히 쉬게 해주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영등포역에 나가보니 기차를 타려고 서성대는 피난민으로 발을 들여 놓을 틈조차 없었다. 이때 남하하는 열차의 출발점이 영등포였다. 피난민들은 하나같이 짐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황급히 나오느라고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못했다. 당장 갈아입을 옷조차 없었다.

문득 이대로 내려가다간 얼어 죽을 것만 같아 중요한 것도 챙길 겸 식구들을 역 앞 여인숙에 있게 하고 단신으로 다시 한강을 건너 왔다. 손수레를 끄는 짐꾼을 데리고 집에 가서 이불, 옷, 기타 필요한 생활용품을 챙겨가지고 영등포로 향했다.

그런데 한강 배다리는 사람만 건너고 짐수레는 건널 수 없었다. 당황한 나는 배에 짐을 싣고 건널 생각으로 마포나루로 갔다. 나루에는 완장을 두른 청년들이 지키고 서서 청장년의 도강을 완강히 막았다. 순간 나는 크게 당황했다. 만일 내가 여기서 강을 못 건넌다면 우리는 이산가족이 될 판이기 때문이다.

▲ 1.4후퇴 당시 임시로 놓은 판자쪽 다리를 통해 한강을 건너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피난민들

나는 무슨 방도가 없을까 생각했다. 문득 생각이 종군화가증에 미쳐 몸에 지니고 있던 그 종군증을 내보였다. 그랬더니 그 청년들은 두 말 않고 배를 태워주었다. 그렇게 위기를 모면하고 여인숙에서 기다리던 식구들과 합류했다. 그리고 바로 역에 나가서 차 편을 알아보았으나 허사였다.

어느덧 날이 또 저물어 여인숙에 돌아와 하룻밤을 더 묵고 다음날 이른 아침에 인부에게 짐을 지워가지고 역으로 나갔다. 역의 기능이 마비된 상태라 개찰이고 검표고 없는데 다만 검고 긴 화물차 한량이 역구내에 죽은 듯이 서 있었다. 움직일 기색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인산인해 속 저만치에 빨강, 파란색 신호기를 손에 말아 쥔 역무원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짜고짜로 그 사람 앞으로 다가가서 “이 기차 떠나는 거지요?” 하고 떠봤다. 간다, 안 간다 말 없이 우물쭈물 하고 있자 나는 얼른 3천원을 똘똘 말아서 그 사람 손에 쥐어주고 부녀자와 어린애들을 내세워 사정을 좀 봐달라고 매달렸다.

그는 무뚝뚝하게 서 있더니 어디론가 가면서 “다른데 가지 말고 꼭 여기에 서 계시오”라고 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해질 무렵에야 그 역무원이 나타나더니 “날 따라 오시오” 하고 앞서서 걸어갔다. 자갈길을 걸어 인적이 없는 곳에 다다르니 또 다른 화물차가 서 있었다. 그는 화물차 문을 열고 사람과 짐을 모두 태워줬다.

이 차에는 나무상자가 사람 키 높이로 꽉 차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포탄이었다. 이 곳간에는 우리 식구 외에도 군복 차림의 경찰간부 가족들 20여 멍이 타고 있었다.

기차는 밤이 되어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참을 가는데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붕 위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소란이 일어났고, 얼마 후 터널을 통과할 때는 지붕에 매달려가던 사람이 떨어졌다고 아우성 치는 소리도 들렸다. 깜깜한 창고 속이지만 우리만 편하게 가는 것이 송구스러웠다.

기차는 이틀 낮, 이틀 밤이 걸려 새벽에 대전역에 도착했다. 나는 대전에 살고 있는 처남 집에 식구들을 맡겨놓고 며칠 후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 중공군이 아직 서울에 들어오기 전이어서, 비워두고 나간 집일도 궁금하고 여주 고향 집도 가보기 위해서다.

혜화동 우리 집에서 극적으로 전투경찰에 들어가 서울에서 훈련을 받던 사촌동생 장우회(張遇會)를 만났다. 하룻밤을 같이 자고 여주 고향으로 떠나면서, 그에게 훈련 중 집도 지킬 겸 남기고 간 양식으로 밥을 지어먹고 있으라고 당부하고 이튿날 아침 서울대 법대 앞 이화동 네거리에서 헤어졌다. 이후 그는 훈련을 마치고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출전했다가 구례(求禮)에서 전사하고 말았으니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작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