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오 선생의 발탁으로 고려대학교 교수로 (35회)
  제6장 해방 후 사회생활

3월 1일이 되자 박 군과 변우창씨 그리고 나는 고려대학교에 모였다. 유 선생이 정법대학장이었고 총장은 현상윤 선생이었다. 먼저 3.1절 기념행사가 강당에서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현 총장은 1919년 3월1일에 있은 비화를 털어 놓으셨다.

특히 육당 최남선 씨가 자신이 기초한 독립선언문을 그가 교제하던 일본 여인에게 맡겼는데 그 일본 여인은 일본 구마모토의 제5고등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져 재수하려고 조선에 사는 누이의 집에 와 있던 남동생의 외투 속에 실로 꿰매어 숨겨가지고 있다가 거사를 앞두고 김성수 씨가 육당을 데리고 가서 찾아왔다는 현 총장의 말씀을 듣고는 모두들 크게 놀라기도 하였다.

기념식이 끝나고 총장실로 가서 현 총장에게 인사를 드리면서 우리가 현인섭 군의 대학 1년 후배라고 소개드리자 현 총장은 매우 반가워 하셨다. 인섭 군은 현 총장의 둘째 아들로서 의학부를 나왔고 나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그 후 현인섭 박사는 이화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60년대 초에 별세하였다. 그리고 우리 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정법대학 부교수의 사령장을 받았다. 그러한 관계로 나와 박군, 변군 세 사람은 3월 1일에 함께 사령장을 받았다는 의미로 3.1조라고 자칭하면서 서로 가까이 지냈고 또 술자리도 자주 가졌다.

5월 10일에는 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고(5.10선거) 이렇게 구성된 국회에서는 우리나라의 헌법을 제정하는 작업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 박사의 요청에 따라 유진오 선생과 그 밖의 몇몇 분들이 헌법 기초위원으로 위촉되었다.

나라의 막중한 헌법을 만드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했기 때문에 유 선생은 나에게 정법대학장의 업무대행을 맡기셨다. 2학기 강의시간표를 짜는 일이 그 주요 임무였는데 어느 날 나는 이 일로 유 선생을 만났고 그 자리에서 또 유 선생은 나에게 상법을 맡으라고 말하면서 황 선생이 상법을 맡든지 또는 사람을 구해오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다. 나는 잠시 궁리를 하던 끝에 북아현동에 사는 차락훈 씨의 집을 찾아 갔다.

대학 1년 선배인 차형을 만나 종로의 한일관에 가서 대구탕을 먹으면서 고려 대학교의 내 연구실로 한번 가보자고 유인하였다. 나는 무조건 그를 대리고 제기동의 학장실로 가서 유 선생을 만나 차형을 소개시키면서 상법 교수를 모셔 왔다고 말하였다. 유 선생이 반가워하자 차형이 한편 놀라면서 기왕에 교수가 될 바에는 형법을 하고 싶다고 했으나 내가 형법교수는 이미 정해졌다고 말하며 그대로 결정하고 말았다.

곧 이어 현 총장에게 가서 차 선생을 인섭 형과는 동기라고 소개하였고 현 총장도 매우 좋아 하셨다. 그러자 유 선생이 나에게 법철학은 본래 자기가 하려던 과목인데 이것을 맡아 보라고 하였다. 정부가 수립되면 유 선생은 정부의 요직인 법제처장을 맡아야 하므로 이 과목을 나에게 준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 현상윤(1893-?) 고려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냈다 (사진출처 국내독립운동 사적지 홈페이지)

이리하여 법철학은 나와는 일생을 통하여 떨어질 수 없는 학문이 되었는데 그처럼 운명적인 결정이 상법교수를 정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우연히 그리고 순간적으로 정해진 것이다. 이때 상법 교수가 된 차락훈 형은 평생을 고려대학교의 상법교수로 지내다가 나중에는 이 대학교의 총장까지 되었다.

하루는 강의를 끝내고 교수실로 돌아와 쉬고 있는데 경상대학장 김순식 교수가 얼굴이 노래져서 내방으로 찾아왔다. 들은 바에 의하면 황 선생은 점을 잘 치신다고 하는데 자기를 좀 도와 달라고 안달이었다. 내용을 들어보니 김 교수는 늦게 결혼하여 이제 겨우 2살짜리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며칠 전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조금 전 부인이 알려오기를 담당의사가 가망이 없으니 데리고 나가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총장의 허락을 얻어 총장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려고 하는데 애비의 간절한 심정을 참작하시어 점 한번만 쳐서 자식놈이 죽을지 살지를 알려 달라는 애원이었다. 그 분의 간절한 소망에 감동된 나는 마침 주머니에 있던 5센트짜리 미국 동전을 꺼내 들고는 정말로 맞고 안 맞고는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 돈을 일곱 번 굴려서 괘를 뽑았다. 그리고는 주역의 괘풀이를 해 나간 결과 이 아이는 가슴에서 열이 나는 것으로 되어 있고 오늘부터 그 열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모래가 되면 병이 다 낫겠다고 하였다.

며칠이 지나자 김 학장은 활짝 웃는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나 그 간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즉, 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서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문득 일본에 있을 때에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장충동에서 소아과 병원을 차렸다는 것이 생각나 차를 돌려 무조건 친구의 병원으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는 환자를 진찰한 그 친구가 급성폐렴이라는 진단을 내리고는 걱정 말라고 하면서 요즘은 페니실린이라는 좋은 주사약이 있어서 금방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배탈이 아니고 가슴에 열이 나는 병이었고 그 아이는 그날 밤부터 열이 떨어져 이틀 후에는 퇴원할 수 있게 되었다. 김 학장은 덕분에 자식놈의 목숨을 건졌다면서 내말 덕분에 용기를 얻어 그 순간에 장충동 친구를 찾아갈 지혜가 생겨났다며 거듭 고마워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때 참으로 주역 공부를 한 보람을 실감나게 느끼게 되었다.

김 학장은 그 후 부산대학교 총장과 숙명여자대학교 총장을 지내고 나중에는 한국계리사 협회의 회장으로 있었다.

을지로에서는 우리 가족 전부가 함께 살았다. 뿐만 아니라 숙부님(용환)의 아들 민갑이와 딸 재복이 까지 월남해서 같이 살았다. 생활비는 전적으로 나의 고려대학교 봉급으로 충당되었다. 쌀은 한 달에 4가마가 소비되었고 매일 쓰는 빨래비누는 1개씩 없어졌으며 김장 때에는 배추 500포기가 필요하였다. 저녁에 시장에 가서 장을 보아올 때에는 지개꾼 한사람이 메고 올 정도였다.

그리고 동생들과의 불화는 잦아들지 않았고 부모님과도 원만하지를 못했다. 이래저래 아내의 불만은 대단히 높아져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할 수 없이 우리 식구만 따로 주교동에 방 한 칸을 얻어 잠시 살기로 하였다. 중구 청계천변의 주교시장 안에 있는 작은 집 부엌 뒷방으로 말할 수 없이 초라한 곳이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비참한 심정이었지만 나는 혀를 깨물고 참으면서 열심히 공부하였고 또한 법학 잡지에 많은 글을 써서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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