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발발 (38회)
  제7장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다. 아침에 라디오를 들으니 38도선에서 충돌사건이 있었다고 했다. 이런 정도의 충돌은 항상 있었으므로 우리는 그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더구나 신성모 국방장관이 입버릇처럼 전쟁이 일어나면 서울에서 아침을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그리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게 될 것이라고 장담해왔으므로 우리는 아침에 있은 충돌사건에 대하여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나는 일상생활대로 명동에 나갔다. 그런데 가두방송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휴가차 부대를 떠나온 장병들은 빨리 부대로 복귀하라는 것이었다.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나는 집으로 돌아와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방송은 그저 침입해 온 적을 물리쳤다는 말뿐 전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하나도 없었다.

26일은 그런 대로 계속되었고 27일에 큰 비가 왔다. 의정부 쪽에서는 계속해서 대포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으나 그러나 적군은 지금 격퇴되고 있으니 국민은 안심하라는 취지의 이승만대통령의 녹음방송만 들려올 뿐이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28일 아침이 되자 비는 그쳤고 서울은 조용하였다. 대포소리는 들리지 않고 하늘은 청명하기만 하였다. 그래서 나는 무심코 옥상에 올라가 보니 중앙청에는 적기가 나부끼고 있고 거리에는 인민군이 우굴대고 있었다.

38도선 저쪽으로 격퇴된 줄로만 알았던 빨갱이들이 도리어 서울을 빼앗은 것이다. 나는 눈앞이 캄캄하고 앞으로 살아갈 방도가 막연하였다.

집 옆에는 토굴이 하나 있고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걸인 한 가족이 거기에서 살고 있었다. 그 집 아이들이 불쌍해서 평소에 먹을 것을 주고 또 옷가지도 준 일이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세상이 뒤집혀서 그 걸인이 동네위원장 감투를 쓰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우리들에게 명령을 하며 다녔고 또 주민들을 마구 죽였다. 다행히 그는 우리 가족에 대해서는 행패를 부리지 않았다. 평소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었기 때문에 우리 가족에 대한 나쁜 감정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도와주지는 않았다.

이렇게 해서 서울에서의 지옥과도 같은 90일간의 숨죽이는 생활은 시작되었다.

고려대학교에서는 매달 27일이 봉급날이었다. 그러나 나는 전쟁 소식으로 마음에 여유가 없었고 또 그 날은 비가 많이 쏟아졌기 때문에 대학에는 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우리 식구는 돈 한 푼 없이 3개월을 지내야 했다. 다행히 편입생으로 들어온 학생의 아버지가 며칠 전에 쌀 2가마니를 가지고 인사 왔기 때문에 쌀 걱정은 없었다.

나는 공산군이 무서워서 그저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런데 박재섭 교수가 나를 찾아왔다. 오해를 살 염려가 있으니 학교에 나와 그들이 무슨 짓을 어떻게 할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으나 그들의 동태를 보아 두었다가 앞으로 처신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강조하였다. 궁리 끝에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 다음날부터 학교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학교에 가서는 별로 하는 일은 없었고 매일 매일 자성문을 쓰는 것이 일과였다. 부르죠아의 아들로 태어나서 일제시대 제국대학을 나왔으며 미제의 치하에서 반동의 생활을 하였다고 고백하는 글을 매일 한 편씩 썼다. 그리고는 우리들끼리 구석구석 모여서 정보를 교환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학생이 없으니 교수로서 강의를 할 수도 없고 연구실 쪽으로는 접근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며칠이 지나자 게시가 나붙었다. 아래 사람은 앞으로 고려대학에 나오지 않아도 좋다는 내용인데 그 속에 내 이름도 끼어 있었다. 결국 제 1차로 숙청된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숨어사는 몸이 되었다. 김순식 학장도 이때에 숙청됐는데 그 후 우리들은 신설동에 있는 김 선생의 집에 매일 저녁 한 번씩 모여 비밀정보 교환을 계속하였다. 박재섭 교수는 2차로 숙청되었고 이건호 교수는 마지막까지 포섭대상에 들어 있었으나 그들도 매일 같이 신설동에 모여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주고 갔다. 이런 상태에서 나의 고난의 90일은 계속되고 있었다.

어느 날 둘째 동생 인이 갑자기 인민 의용군으로 나가겠다고 자원하고 나섰다. 인은 어머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고 사사건건 나와는 반대로 하였는데 이번에도 내가 반공의 길을 걸어가자 그는 친공의 길을 택하였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의 불문학과를 나온 그는 경기고등학교에서 프랑스 말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 학교 학생들과 같이 인민군에 지원하고 나선 것이다.

나는 그를 극렬 말렸다. 꼭 군대에 나가야하는 것도 아닌데 왜  자진해서 가려고 하는지 그를 다방으로 끌고 들어가 여러 방면으로 설득시켜 보았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면서 매일 미군기가 와서 폭격하고 가는데 자기 한 몸이라도 나아가 싸워 조국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 .한국전쟁 당시 인민의용군에 징집된 장정들

그가 이와 같이 감상적인 공산주의자로 굳어진 것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반공주의자인 나에 대한 반감과 반항심 때문에 공산당 편을 드는 것인데 무의미하게 죽을 것이 뻔한 곳으로 동생을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나는 끝까지 동생을 붙들고 늘어졌지만 그는 나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진해서 의용군에 나가겠다고 선언하였다. 다음날 모이는 장소인 수송초등학교까지 어머님과 내가 따라가서 만류해 보았으나 끝내 듣지 않고 교문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것이 동생과의 마지막 헤어짐이었고 그 후 우리는 다시는 동생을 볼 수가 없었다. 어머님께서는 항상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버리지 않으셨지만 그는 끝내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고 말았다. 나중에 들은 소식에 따르면 그는 의용군에 끌려 간지 한 달 후 하동전투에서 전사하였다는 것이다. 미련한 놈, 그는 형이 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반대하려고 하다가 결국 무의미하게 죽은 것이다. 그가 돌아오기를 마지막까지 기다리고 계시던 어머님에 대하여 그는 씻을 수 없는 불효를 저지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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