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상공에서 떨어지는 폭탄을 보고 (39회)
  제7장 한국전쟁

고려대학교에서 숙청된 나는 집에 그대로 있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아침 공산당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를 찾아 왔다. 집사람이 황급히 걸레로 마루를 닦으면서 들어와 앉으라고 권하였고 나는 급히 이불을 덮고 누었다. 주인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는 질문에 고려대학의 교수인데 오늘은 이질에 걸려 몸이 아파서 누어있다는 말에 그들의 표정이 달라지더니 곧 나가버렸다.

이때부터 나는 낮에는 집에 붙어있지 않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서임수, 김경수 두 젊은 교수들과 매일 만나 종일토록 서울 시내를 다니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활개를 치면서 빠른 속도로 걸어가면 기관원인 것처럼 보여서 불심검문을 당하는 일도 없었다. 점심은 길가에서 중국인이 만들어 파는 꽈배기를 사먹는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 거리를 다니다가 나는 광교다리에서 김일성을 보기도 하였다. 짚차에 그가 타고 있었고, 사방에 4대의 기관총을 겨눈 호위병이 따르고 있는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동대문 옆을 지나갈 때에 왕십리 쪽에서 미군 전투기 2대가 나타났고 공습경보는 요란하게 울러 퍼졌다. 인민군 병사가 튀어나와 거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건물 밑으로 대피하라고 소리치며 다녔다. 그러나 시민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서있는 자세로 하늘을 쳐다보기만 하였다. 하루라도 미군 비행기의 공습이 없으면 혹시나 미국이 우리를 버리지 않나 하고 불안해하는 것이 당시의 서울 시민의 공통된 심정이었다.

나도 거리에 선채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전투기들은 나의 머리 바로 위에까지 오더니 까만색 폭탄 2알을 떨어뜨렸다. 순간 나는 겨우 33년 밖에 못 살았는데 여기서 죽는가보다 하고 질겁하여 놀라는 사이 그 폭탄은 그대로 직진하여 서울역 뒤에 있던 무기창고에 명중하였다. 그 창고에는 인민군이 밤새 북쪽에서 실어다가 숨겨둔 군수품이 가득 저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때 나는 다시 신설동 쪽으로 걸어가면서 가만히 생각하였다. 아까 그 폭탄의 낙하궤도를 땅위에서 보면 포물선이 되겠지만, 폭탄을 떨어뜨리고 그대로 전진하는 비행기 위에서 보면 직선이 될 것이다. 땅 위에서 보는가 비행기 안에서 보는가에 따라 이처럼 그것의 낙하궤도는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 폭탄본래의 낙하궤도는 과연 무엇일까.
 
▲ 6.25당시 미 전투기의 폭탄 투하

골똘히 생각에 몰두하면서 걸어가는 동안에 나는 문득 평양에 있을 때에 읽었던 책이 생각났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해설하는 책이었는데 그 때에 읽었던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 보면 폭탄의 본래의 낙하궤도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대상을 a의 방법으로 관측하면 A라는 법칙이 만들어지고, b의 방법으로 관측하면 B라는 법칙이 만들어진다. 이와 같이 하나의 대상에 대하여 각기 다른 법칙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대하는 관측방법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어떠한 관측에도 관련됨이 없는 대상 그 자체의 존재법칙 n은 과연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아인슈타인은 그러한 n은 없다고 말한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리하여 나는 저 폭탄의 본래의 낙하궤도는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그저 이 정도로만 생각하였고 그 이상 더 깊이 파고 들어갈 여력이 나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30년 정도 지난 후 나는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유비이비무(有非而非無)라는 사상을 확립하였다. 그것은 금강경에 있는 여래설세계 비세계 시명세계(如來設世界 非世界 是名世界)라는 말씀에 기초를 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사상에 입각하여 나는 나의 법철학 사상을 정리해 나갔다. 그러한 점에서 동대문 상공에서 폭탄이 떨어지는 것을 본 나의 경험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것이 되었다.

하루는 불과 한 달 전 화계사로 갔던 최은섭 군이 건강한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다. 6.25 때 땡크를 타고 서울에 들어온 그가 을지로 집에 와서는 ʻ이제는 내 세상이 되었습니다. 산덕이 어디로 이사 갔습니까. 며칠 후에 오겠습니다ʼ 라고 어머님께 말하고는 그대로 땡크를 타고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가 오늘 묵정동 내 집을 찾아온 것이다. 본래 최 군과 나는 평양에서부터 친한 사이였다. 어렸을 적의 친구 김원찬은 평양 숭인상업학교에 들어갔는데 최 군은 김 군과 이 학교 같은 반이었으며 그때부터 우리는 친하게 지냈다.

나중에 최 군은 연희전문학교를 다녔으므로 나와는 학교는 달랐으나 죽마지고우처럼 늘 가까이 지냈다. 해방이 되자 그는 소련군의 민정장관 로마노프의 비서로 있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로마노프는 김일성을 만들고 또 키워내서 오늘의 권좌에까지 올려놓은 장본인이다. 최 군은 그 밑에서 경제담당 비서로 있다가 1949년 봄에 밀령을 띠고서 돌연 서울에 나타났다. 물론 나에게는 폐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왔다고 거짓말을 하였고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나는 그를 데리고 참모총장 채병덕장군의 집을 찾아가 냉면을 먹기도 하였고 또 서울의 여기저기를 구경시켰다. 그 사이 입원절차가 끝나 그는 서울 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 나와 김봉관은 자주 문병을 갔다. 그런데 갈 때마다 이상한 여인이 옆에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였다. 얼마 후 그는 병이 악화되었으니 청운동에 있는 순화병원으로 옮긴다고 하였다. 그의 병실 창문으로부터 경무대(옛 청와대)가 빤히 건너다 보였다. 그는 망원경을 들고서 그 쪽을 보면서 조금 전에는 농림부장관 차가 경무대로 들어갔다고 하는 등 환자로서 심심치 않아 좋다는 말까지 하였다.

우리는 그것도 의심하지 못할 만큼 순진하였다. 그들은 이미 1년 전부터 이렇게 남침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이 쪽에서는 누구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1950년 5월이 되었다. 폐병은 더욱 악화되어 가망이 없으니 공기 좋은 화계사에나 가서 조용히 있다가 죽을 작정이라고 하여 우리는 침통한 심정으로 그를 떠나보냈다.

그러던 그가 6.25가 되자 땡크를 타고 서울로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는 지금 건강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 서울시당국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보니 아주 명랑하지 만은 않은 것 같았다. 아내가 그에게 말하기를 최 선생은 소원 풀이를 하였지만 이 사람의 앞날은 막막하다 라고 하자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가 말하기를 ʻ나는 자네가 부럽네. 지금 매일 미군 비행기가 공습을 하고 있는데 미군과 싸워서 김일성(장군의 호칭을 붙이지 않고)이가 이길 것 같은가. 머지않아 미군이 서울에 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네의 앞날은 환히 열릴 것이니 당분간만 참고 있게. 아무리 괴롭더라도 이쪽에 붙지는 말게. 나는 자네에게 이 말을 하려고 왔네. 나는 빨치산이 되어 대전 부근으로 가기로 되어 있네. 그럼 잘 있게.ʼ

그리고는 총총걸음으로 떠나가 버렸다. 9.28 이후 미아리 부근에서 국군헌병의 총에 맞아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친구로서의 우정을 그는 나에게 다 바치고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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