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태로웠던 9.28수복 직전 (40회)
  제7장 한국전쟁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종일토록 서울 시내를 헤메고 다니다 돌아온 나는 옥상에 올라가 면도를 하였다. 아침에는 일찍 나가야했기 때문에 면도를 할 시간이 없었다.

날은 이미 어두웠으나 전등불을 켤 수가 없었으므로 옥상에 올라가 석양을 이용하여 면도를 하였던 것이다. 때마침 B-29 2대가 와서 신나게 공습을 하였고 영준과 대유 그리고 나는 옥상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얼마 후 인민군 병사 2명이 나를 잡으러 왔다. 공습해온 B-29에게 거울로 신호를 했다는 것이다. 내가 면도를 할 때에 사용한 거울이 석양에 반사되어 근처 동국 대학교에 있던 인민군의 눈에 비친 모양이다. 적기에게 신호를 하였으니 이것은 틀림없는 사형감이다. 즉결 처분을 당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인민군 병사가 나에게 물었다. ʻ당신 말고 두 사람 더 있었는데 그들은 어디 갔소.ʼ 아마 내 옆에 있던 두 아들을 보고서 그러는 것 같았다. 나는 다른 사람은 없었다고 하였으나 그들은 믿지않 고 계속 바른대로 말하라고 하였다. 나는 옆에 있던 대유를 가리키며 이애는 7살 난 내 아들인데 어린애는 거짓말을 안 하니 저기로 데리고 가서 누가 나와 함께 있었는지 물어 보라고 하였다.

그 병사는 대유를 데리고 10m쯤 가더니 물었다. ʻ아까 너의 아버지 말고 두 사람 더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누구였지?ʼ 하자 대유는 ʻ형하고 나ʼ라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멋쩍은 표정을 짓더니 그중의 하나가 ʻ야 잘못 찾은 것 같다. 딴 집으로 가보자. 실례했습니다.ʼ 라고 말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결국 대유 덕분에 나는 위기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6개월 뒤 부산으로 피난 가서 대유는 이름 모를 풍토병에 걸려 급사하였지만 그는 이 급박한 판국에서 천사와도 같이 아버지를 살린 것이다.
 
8월이 가고 9월에 접어들자 심상치 않은 공기가 감돌았다. 밤이 되면 청년들이 일본도를 들고서 어떤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고 그 다음날 아침이 되면 그 집 식구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리가 동네에 퍼졌다. 완전한 공포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동네에 사는 몇몇 가족이 나의 방밑에 있는 지하 대피실에 모였다. 자위대까지 조직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과 싸울 태세까지 취하고 있었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계속되는 나날이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9월 26일이 되자 남산 위에 나타난 미군의 모습이 우리의 눈에 보였다. 그 너머 용산 쪽은 이미 우리군에 의해 수복되었음이 틀림없었다. 우리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서로 다짐하면서 자중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우리집 뒤에 있는 조그만 학교시설(지금의 앰배서더호텔자리)에는 인민군이 박격포를 장치해 놓고 남산의 미군에 대항하여 싸울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미군을 향하여 대포를 쏘자 남산위의 미군은 우리 집 쪽을 향하여 포격을 시작하였다. 위험이 닥쳐온 것을 직감한 나는 순간적인 판단으로 그 집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 9.28수복 직후의 시가전 [사진출처 : 서울시]

아내는 급히 집으로 올라가 가재도구를 챙기려고 하였으나 나는 고함을 지르면서 가재를 모두 버리고 몸만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황급히 맨손으로 애들 넷의 손만 잡고서 그 집을 빠져나와 채 50m도 가기 전에 우리가 살던 집은 직격탄을 맞았다. 우리는 사방이 포탄을 맞아 집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속을 총총걸음으로 빠져 나와 오장동에 있는 서임수 교수의 집으로 갔다. 그 일대는 아직 포탄의 세례는 받지 않고 있었으나 사방이 온통 불에 타고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연기 때문에 쓰라린 눈을 비벼가면서 간신히 찾아가니 서 교수도 피난가기 위하여 짐을 꾸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애들의 손을 잡고 을지로 4가에 있는 선친댁으로 향하였다. 골목을 나와 큰길 하나만 건너가면 목표지점까지 다달았는데 포격은 없었으나 길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어딘지 모르게 삼엄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길을 건너기전 한쪽 모퉁이에 인민군 병사 한명이 서 있었다. 16세가량 되어 보였는데 그가 들고 있는 장총이 그의 키보다 길었다.

나는 애들의 손을 잡은 채 그 병사의 앞으로 가서 절을 하고는 길 저쪽에 나의 집이 있는데 건너가도 좋겠느냐고 물었다. 허락 없이 길을 건너다가 뒤에서 총이라도 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는 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였다. 순간 나는 이처럼 어린애까지 전쟁 마당에 몰아넣는 김일성 일당이 밉기만 하였다.

그런데 그 소년병은 언뜻 “어서 건너가서 살아야 지요” 하면서 우리를 무사히 보내 주었다. 그 소년병은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나는 그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고 절을 하고는 길을 건넜다. 곧 바로 을지로 집에 들어가니 선친께서는 우리들을 현관에 세워둔 채 지금 우리 가족이 모두 모여 있다가 만일 포탄이라도 맞으면 우리 집안은 전멸한다. 집안 식구를 둘로 나누어야하니 우리는 다른 곳에 가있으라고 하셨고 선친의 이 말씀은 참으로 지당하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그 길로 애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으나 마땅히 갈 데도 없었다. 서대문에 사는 차락훈 교수가 생각나기도 하였으나 너무 멀어 불가능한 일이고 이제 곧 해가 떨어져 어두워지면 서울 거리는 암흑세계가 될 판이다. 우리는 일신국민학교 쪽으로 무턱대고 걸어가다가 평소에 알고 지내던 최 노인 집을 발견하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최 노인의 가족은 없었기에 나는 주인 없는 집에 그대로 들어가 그날 밤을 보내기로 하였다.

2층으로 된 일본식 가옥이라 가족들은 아래층에서 의자 같은 것을 쌓아놓고 휴식을 취하였고 나는 옥상을 오르내리면서 전투상황을 지켜보았다. 만일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또 다른 곳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남산 위에 있는 미군과 시내에 자리 잡은 인민군은 밤새도록 포격전을 교환하고 있었고 인천을 상륙한 우리 군과 미군은 이미 한강을 넘어 시내 남쪽까지 와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가족 보호만이 내 책임이라는 생각에 나는 한잠도 자지 않고 밤새도록 상황 판단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런 상태에서 9월 26일 밤은 지나가고 27일이 되었다.
 
시내는 죽은 듯이 조용하였고 때때로 패잔병 비슷한 인민군 몇 명이 황급하게 지나갈 뿐이었다. 오후가 되자 을지로 4가 쪽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미 해병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국제극장 앞에서 사거리 쪽으로 오고 있었고 언제 나왔는지 많은 시민들이 그들을 환영하며 환성을 올리고 있었다. 을지로 6가 넘어는 아직 인민군이 있어서 포격전이라도 벌어지면 어떻하나 걱정했지만 웃통을 벗어 제치고 껌을 씹으면서 탱크의 뒤를 따르는 미군 병사들은 그저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선친을 모시고 나와 이 광경을 보면서 한없이 기뻐하였다. 9월 28일에는 서울 전역이 수복되었고 포성은 의정부 쪽으로 멀어져 갔다. 고난의 90일은 이제 끝난 것이다.

 
  동대문 상공에서 떨어지는 폭탄을 보고 (3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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