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법회의 검찰부 (70회)
  제11장 영어(囹圄)의 생활

안 부장은 곧 손목에서 고랑을 풀러 주었고 손목에 묻은 모빌 기름을 종이로 닦아 주었다. 육군대위의 계급장을 달고 유원종이라는 이름표를 붙인 그 장교는 나에게 앉으라고 손짓을 하고는 파고다 담배 한 갑을 내 주면서 자기는 따로 주머니에서 백양담배를 꺼내 피운다. 나도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더니 옆에 서있던 장교들은 성냥을 켜서 담뱃불을 붙여준다.

길게 한 모금을 들여 마시고 아찔해진 정신을 가다듬고 의자에 기대고 있었더니 “저희들은 모두 법대 출신입니다. 선생님을 이렇게 모시게 되니 저희들의 마음은 참 괴롭습니다” 라고 말을 한다. 나도 제자들에게 이런 꼴을 보이게 되어 면목이 없다고 하자 그들은 유 대위를 가리키며 저 친구도 서울대학교 출신입니다만 농과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선생님의 사건을 맡으라고 위에서 지시가 있은 것입니다. 검찰부장 김인덕 중령도 법대 출신입니다라고 말해준다. 이때까지 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숙이고 담배만 피우고 있던 유 대위가 “저도 선생님의 책으로 고시공부를 하였습니다.”라고 말참견을 한다.

앞으로 나의 사건을 가지고 공판을 유지해 나가야 하는 바로 그 담당 검사가 피고인인 나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은 이것이었다. 그러자 내 옆에 둘러서 있던 다른 장교들은 “저 친구, 처음에 동아일보 사설을 보고는 자기도 황 선생님의 의견에 찬성한다고 큰 소리 치더니 이제 황 선생님의 사건을 자기가 맡게 되어 죽을려고 합니다. 저것 좀 보십시요, 풀이 죽어 있지 않습니까.”라고 놀려준다. 나 때문에 젊은 장교들의 입장이 곤란해져서는 안 될 터이니 서슴치 말고 법대로 처리 하라고 나는 말하였고 유 대위는 그냥 머리만 수그리고 말이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담배만 피웠고 같이 있던 장교들은 각자 자기 방으로 가서 오늘 나온 피의자들을 취조하고 또 공판정에 나가느라 분주하였다. 법무감실에 있는 다른 장교들도 찾아와서 위로하고 갔으며 점심때가 되자 어떤 장교가 설렁탕 한 그릇을 가져다 주었고 식사가 끝나자 커피까지 내왔다. 이와 같이 나는 여러 다른 장교들과 명랑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옆에 앉아있는 유 대위는 고개만 숙이고 담배만 피울 뿐 말이 없었고 간간히 한숨까지 새어 나왔다.

이윽고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을 무렵에 유 대위는 크게 한 숨을 몰아 쉬더니 자기 앞에 있는 기록 뭉치를 나 있는 쪽으로 내밀면서 이것 한번 읽어봐 달라고 말한다. 그것은 중앙정보부에서 넘어온 나에 대한 피의자 심문조서의 뭉치였다. 나는 그 기록의 한두 군데를 뒤적이며 보고 나서 그 서류 뭉치를 유 대위 앞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그러자 유 대위가 “왜, 안 읽으십니까?”라고 해 나는 “보나 마나 잘 됐겠지요.”라고 답했다.

“아닙니다. 이것은 나중에 공판정에 가서 유력한 근거가 되는 것이므로 선생님이 정보부에서 말씀하지 않은 것이 여기에 적혀 있으면 지적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 적혀있는 것을 부인하면 유 대위가 처음부터 다시 조서를 꾸며야 할 것 아니요. 그냥 그대로 둡시다.”

이 때에 유 대위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용지 한 장을 꺼내면서 이것은 검찰관의 조서용지인데 여기에다 피의자가 수사관 앞에서 진술한 것은 사실과 어긋나지 않다고 적어 넣어도 좋으냐고 묻는다.
 
군법회의.jpg

중앙정보부는 법제상으로는 경찰서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하나의 수사기관에 불과하며 여기에서 작성된 피의자 심문조서는 원칙적으로 검찰관을 구속할 힘이 없고 검찰관은 독자적인 입장에서 새로이 조서를 꾸밀 수 있는 것이지만 군정하의 당시의 형편으로 보아 정보부에서 김종필 씨의 결재를 얻어 보내온 조서와 다른 내용의 조서를 일개 젊은 검찰관이 함부로 작성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평상시라면 검찰이 수사기관보다 위에 서는 것이지만 중앙정보부에 한해서만은 사실상 수사기관이 검찰을 지휘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재판부에 대해서까지도 간섭을 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나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내가 만일 정보부에서 진술한 것을 부인하는 경우에는 유 대위는 진퇴유곡의 난처한 입장에 서게 될 것이며 참을 수 없는 압력을 정보부가 유 대위에게 가하는 경우에는 유 대위는 자신이 형무소에 갈 것을 각오하고 그 압력에 반항하든가 아니면 그 압력에 굴복하여 나에게 불순한 태도로 나오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이든 불행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로서는 사제관계에 금이 가는 것도 원하지 않았지만 젊은 검찰관의 앞날의 출세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나는 정보부에서 기록한 것을 여기서는 우선 그대로 승인하고 나중에 공판정에 가서 필요할 때에는 그때 가서 생각해 보도록 할 작정이었다.

이것으로 아침부터 유 대위를 괴롭혀 온 검찰조서는 무난히 작성된 셈이 되었다. 유 대위도 퍽 안심이 되는 모양이며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안상배 교도를 부르더니 우리 선생님을 때때로 모시고 나와 바람이나 쏘이도록 해드리라고 지시하였다.

원칙으로 피의자나 피고인은 검찰이 부르든가 공판이 있을 때에만 출정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몇 달이고 형무소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검찰관은 사상범과 같은 특수한 피의자에 한해서는 아무런 용건도 없으면서 그저 불러내 담배도 권하고 가족과 면회도 시키면서 그 마음을 돌려 보려고 시도하는 일이 있는데 유 대위는 검찰관으로서의 이러한 특권을 행사한 것이다.

내가 5개월 동안이나 형무소 생활을 하면서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조금도 타격을 입지 않고 그대로 건재할 수가 있었던 것은 유 대위의 이러한 배려와 이에 협력한 안상배 부장 및 이병철 담당의 호의 때문이었던 것이며 이 분들에 대해서는 일생의 은인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감사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 내가 나중에 법무부장관이 된 다음에 유 대위에 대해서는 다소의 보답을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옆방에서 다른 피의자들에 대한 검찰 심문도 다 끝난 모양인지 각자 자기 방으로 갔던 법대출신 장교들이 다시 돌아와 담배를 권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기가 다루고 있는 사건에 관하여 법적으로 문제되는 점들을 물어보기도 하였다. 이윽고 안 부장이 와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고 하며 다시 나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자 이를 보던 장교들은 차마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다는 듯이 시선을 돌려 뿔뿔이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밖으로 나와 아침에 같이 왔던 피의자들과 함께 수갑을 차고 그 대열을 따라 트럭에 올라탔다. 죄수 수용차라는 표지가 붙은 이 군 트럭은 육군본부를 나와 한남동 길을 돌아서 필동에 있는 수도방위사령부에 들려 군인 죄수들을 그 곳에 내려놓고는 다시 돌아 나와 회현동을 지나 한국은행, 조선호텔, 덕수궁, 법원 앞을 거쳐 서대문 영천에 있는 형무소로 돌아갔다.

수갑을 찬 채로 트럭 속에서 내려다 보는 서울의 중심부 거리는 자유와 활기로써 충만해 있었으며 나도 저렇게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했던 적이 있었던가를 의심할 정도였다. 그리고 지나가는 부녀자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무슨 악마의 세계에서 나온 사람을 보듯이 놀라는 데에는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트럭이 조선호텔 앞을 지날 무렵에 조규동 교수가 친구 몇 사람과 골목에서 서성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저 사람 또 한잔 하러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더욱 더 신세가 서글펐다.

 
  구치소에서의 일과 (69회)
  지루한 감방생활 (71회)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