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삶의 일상에서 크게는 세상을 바꾼 동기나 작게는 한 개인의 삶을 변형시킨 일화나 현상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처음 시작에는 미미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달라질 수 있기에 어떤 새로운 사건이 생겼을 때나 중요한 결심을 할 때 부모나 스승, 그리고 전문가들과 상의도 하고 또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다소 성격이 급하고 내성적인 나의 경우, 돌이켜 보면 어떤 중요한 결심을 하였을 때도 비교적 주위의 사람들과 상의를 하거나 그 결과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하찮은 문제도 몇 년을 끙끙거리며 허비한 적도 있고 또 모든 것이 예상외로 잘 풀려서 내 인생을 크게 바꾼 적도 있다.
운명처럼 대구에서 서울유학으로 바뀌다.
원래 우리 집안의 계획은 내가 문경중ㆍ고등학교를 마치고 대구로 가서 대학공부를 하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내가 서울에서 공부하게 된 동기는 문경중학교 졸업 몇 달 전인 3학년 2학기 때, 나이가 많으면 대학에 못 간다는 헛소문을 들었던 큰형은 나를 숭문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시켰다
내가 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1952년에는 한국의 중학교 입시제도정책은 국가 연합고사제도(1951~53)가 시행되던 시기였다. 나의 국가시험성적은 상당히 좋았으나 문경중학교 입학성적은 별로 좋지 않았다.
나는 나보다 세 살 아래인 질녀와 함께 9세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 당시 정부에서 일정한 나이 이상의 학생들한테는 초과연령에 따라 점수를 삭감해서 중학교 입시에 반영하도록 했다.
많은 점수를 깎이고 중학교에 입학한 나의 처지를 몹시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당사자인 나보다도 형이었다. 내가 1969년 미국유학을 올 때까지 나에게 이 얘기를 가끔 반복하여 들려준 것을 돌이켜보면 당시의 큰형 마음이 무척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 같은 정부 시책은 부당한 처사였다는 것을 여러 번 얘기했으며, “너는 정부관리가 되거든 그러한 부당한 정책이 없도록 노력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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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부터 필자의 큰형(김영희), 둘째형(김병희), 삼촌(김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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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도 다녀본 적이 없는 형은 내 초등학교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했음에도 조카들보다 동생인 나를 대학까지 공부시키는데 헌신하였다. 나이가 많으면 대학에 입학할 수 없다는 형의 말이 헛소문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그때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다소 이해가 된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서울구경 한번 하는 것이 평생소원이었고 서울구경을 한 번도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 당시 우리 마을에는 가까운 순천 김 씨들만 모여 사는 전통적인 씨족부락이었다. 나의 기억으로는 당시에 우리 마을에는 라디오, TV나 전화를 가진 사람도 없었고 신문 보는 사람도 없는 빈촌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재래장터인 5일장에서 들은 화제가 뉴스의 전부였다.
5일장은 농민과 내수공업 자들이 일정한 날짜와 장소를 정해 서로 곡물, 채소, 생활용품 등을 교환하던 농촌의 정기시장 형태로 출발했으며 조선시대에 처음 등장한 것이다. 조선시대 후기부터 20세기 초에 절정을 이룬 5일장은 1900년대 중후반까지 계속 유지됐으나, 도시화와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1980년대 이후 점차 지역마다 쇠퇴일로로 접어들다가 결국은 없어지고 말았다. 근간에는 지역마다 시장의 시설을 현대화하고 5일장을 지역축제 등 관광 상품과 연계시켜 활성화를 시도하고 있는 추세이다.
시골에 장이 서는 곳마다 다니면서 잡화상을 하시던 형은 특히 여러 사람한테서 들은 소식을 가끔 식사 때마다 가족들에게 들려주었다. 특히 나이가 많으면 대학에 못 간다는 소문은 수없이 얘기했고, 그 소문을 의심하지 않고 나 자신도 믿게 된 것은 중학교 입학 때 나이가 많아서 많은 점수를 잃은 사실상 피해를 체험한 탓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헛소문은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도 나로 하여금 대구보다 서울에서 공부하게 만들었고, 큰 꿈을 가지게 하였으며 대학전공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의 삶에 있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이처럼 근거 없는 헛소문이 내 삶에 미친 영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