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정변_3 (54회)
  제6장 군 생활과 격동의 시대

반(反)혁명 군부를 가려내는 작업이 비교적 일찍 시작되었다. 반대 세력을 우선 연행하는 쪽으로 결정했다. 주요 지휘관 가운데서 반혁명으로 찍힌 장군들을 가려내는 과정에서 6관구 사령관에 대해서 다소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다.

시청에 가서 계엄 업무를 맡은 다음날 점심 때 쯤이다. 서(徐) 장군은 참모들과 식사를 먼저하고 사무실에 들어 오셨고 나는 김연중 상병에게 부관실을 맡기고 잠깐 식사를 하고 돌아왔는데 부관실이 요란했다. 김재춘 대령의 고성(高聲)이 들리고 누구를 야단치는 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쫓아가보니 김 대령이 헌병 대위 한 사람의 가슴을 밀면서 야단을 친다. “누구의 명령이야, 내가 혁명의 핵심이야. 우리 6관구가 혁명의 거점이야. 누가 감히 이런 지시를 해! 돌아가, 말도 안 되는 짓들 하고 있어!” 대단히 흥분해 있었다.

김 상병이 쫓아 나오더니 “부관님, 저자들이 사령관님을 연행하러 왔대요.” 한다. 헌병 대위와 상사 한 사람이 연락도 없이 나타나 사령관을 면회하겠다고 했다. 태도가 심상치 않아 바로 옆방의 참모장실의 김 대령에게 연락을 했더니 바로 쫓아와 이들과 대면했다. “귀관들 뭐야!” 했더니 상부의 지시에 의해 사령관을 동행해서 조사할 것이 있다고 답했다. 이에 김 대령이 흥분해서 쫓아내려고 야단을 치게 된 것이었다.

쟁쟁한 참모들인 박원빈 작전, 윤성민 정보 등 여러 참모들이 모여들어 계급으로 압박을 했더니 제3 CID에서 온 이 두 사람 사태가 여의치 않았는지 후퇴하고 말았다. 다행이었다.

곧이어 김 대령이 혁명지휘본부가 있는 덕수궁으로 쫓아가 박정희(朴正熙) 장군을 만나 항의를 하고 매우 불쾌하다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특히 “6관구 사령관이 묵인한 것만 해도 혁명성공에 결정적인 요인이 됐는데, 왜 이러십니까.” 했단다.

박(朴) 장군도 서(徐) 장군 연행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디론가 전화를 하시더니 서(徐) 장군 연행은 중지하도록 지시를 했단다. 천만다행이었다. 1군 사령관 이한림(李翰林) 중장, 김형일(金炯一) 중장, 30사단장 이상국(李相國) 준장 등등 줄줄이 연행되어 반혁명으로 모조리 옷을 벗었던 때였다. 아마도 30사단 작전참모 이백일(李白日) 중령 등 몇몇 주체들이 김종필(金鍾泌)중령과 합의한 끝에 서(徐) 장군 연행을 결정한 모양이다.

이야기는 5월 15일 오후 7시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색(水色)에 있던 30사단 이백일(李白日)중령이 독단으로 기간요원을 단독군장으로 연병장에 집결시켜 출동하려고 한 것이 사전에 탄로가 났다. 이를 보고받은 이상국(李相國) 장군은 즉시 사단 헌병대를 풀어 이(李) 중령을 체포하도록 지시하고, 상급 부대장인 6관구 사령관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이(李) 중령은 사태 불리하자 소집된 기간요원을 그대로 두고 사단 뒷산으로 도피를 했고, 혁명이 성공하자 하산했다고 한다.

이런 이상한 동향을 보고받은 서(徐) 장군은 즉시 6관구 헌병참모부가 위치한 중구 필동 기지(基地)에 가셔서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내 집에는 당시에 군(軍) 전화도 없었고, 민간전화도 개설하기 전이었음, 따라서 나에게 연락이 되지 아니하였음).

6관구 주요 참모들이 모두 혁명에 관계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따라서 6관구 사령부에는 연락을 하지 않고 휘하 30, 31사단과 연락을 하면서 지시 없이는 일체 병력 이동을 하지 못하도록 사령관으로서 「모라토리엄」을 내린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던가보다. 다시 말해 일부 주체들은 「혁명」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왜 즉시 참여의 결단을 내리지 않았느냐 하는 논리였던 모양이다.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일방적 욕심이다. 별을 두 개나 단 수도경비(首都警備)를 맡은 위수사령관(衛戍司令官)이 어찌 상황판단도 하지 않고 부화뇌동할 수 있단 말인가?

박정희 장군으로서는 서종철(徐鍾喆) 장군을 두고두고 써먹을 군(軍)의 재목(材木)으로서 깊이 마음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서(徐) 장군은 박(朴) 장군이 거쳐 간 군의 주요보직을 뒤따라 다니면서 음으로 양으로 많이 어질러 놓은 일들을 생색내지 않고 조용하고 말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특히 1군 참모장, 6관구 사령관 등등을 거치면서 혁명에 결정적 역할을 한 6관구 참모장 자리를 박(朴) 장군의 뜻을 받아들여 해결해 준 일 등 서(徐) 장군에게 많은 신세를 졌고 그런 의리에 보답했으리라(인간적으로도 많은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안다).

6관구 사령관을 마치고, 육본 정보참모부장, 인사참모부장, 군단장, 참모차장 그리고 1군 사령관에 육군 참모총장까지 그야말로 군(軍)내의 KS코스를 제대로 밟고, 총장 임기가 끝나자 청와대의 안보보좌관으로 곁에 두고 있다가 국방장관으로 발탁했다. 장관을 그만 두자 다시 안보보좌관으로 청와대에 불러들여 10 .26을 맞이하게 된다.
 
5.16의 「에필로그」

연행 사건이 있던 그날 밤, 서(徐) 장군이 당신의 방으로 나를 조용히 부르신다. 책상 위에 권총이 두 자루 가지런히 놓여 있다. “부관.” “네.” “이 ‘리볼버’ 는 집사람에게 갖다 주고 이 ‘브로닝’ 권총은 귀관이 휴대하게.” 하신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서 각오를 하신 모양이다.

무인(武人)이 자기의 무기를 손에서 놓는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의 마음이 써늘해 졌다. 일단 지시대로 거두어 내 방으로 돌아왔다. 당번 김 상병과 사령관 운전병 김 중사에게 방을 맡기고, 잠깐 반도호텔 쪽으로 가서 약방에 들렀다. 내가 복용할 소화제를 사고, 가만히 생각하니 서(徐) 장군에게 잠 잘 오는 약이 필요할 것 같아 진정제인 「세리나」 한 통을 샀다. 김 상병을 시켜 물과 약을 보내 드렸다.

다음날 아침 참모장과 식사를 나간 사이 사령관실에 잠깐 들어가 보니 탁자 위에 「세리나」 통이 놓여 있었다. 열어보니 10정 들이 「세리나」 약이 한 톨도 남지 않고 비어 있어서 깜짝 놀랐다. 거구이기는 하니 다섯 알 정도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5인분을 다 먹었다고 하면 좀 이야기가 달라진다. 얼마나 답답하고 심란했으면 과다 복용을 서슴지 않았겠는가.

이즈음에서 서(徐) 장군의 심리분석을 좀 할 필요가 있다. 그 사건으로 몹시 자존심이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6.25 전쟁에 참전한 장성(將星)들을 보면 하나같이 몸에 상처가 없는 사람이 드물다. 크건 작건 간에 모두 멍이 들어있다. 군인은 용맹으로 그 생명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예가 실추되고 자존심이 상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전투경력이 많은 장성 출신 일수록 평화주의자(平和主義者)가 많다. 처절한 싸움의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이 그들로 하여금 전쟁에 대한 혐오와 공포를 가지게 했나 보다. 군인이니까 무조건 싸움을 좋아한다는 일반론(一般論)은 근거가 없다.

1, 2차 대전(大戰)의 참상을 목격한 Eisenhower 대통령은 「At any cost」 한국전쟁은 중지하고, 우리 젊은이들로 하여금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불리(不利)하고 정의의 응징이 안 된 상태에서 휴전을 강행했다.

일본육군이 주동이 된 2.26사건과 1932년 만주사변(滿洲事變), 그리고 1937년의 중국 대륙 침공 등도 모두 전쟁 경험이 없는 소좌(少佐), 중좌(中佐) 급의 젊은 장교들이 획책했다. 이때 고위장성(高位將星)들은 등이 떠밀려 앞에 나선 것으로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서(徐) 장군의 혁명 참여 결단은 조급했던 당시의 주체들에게는 일각이 여삼추의 느낌을 주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약간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확한 상환 판단은 대단히 중요하다.

“군인의 「쿠테타」는 대한민국 헌법을 유린하는 일로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막아야 한다고 대항군을 서울 일원에 풀었을 때 어떻게 되겠는가!” 고려 때 무신난동(武臣亂動)의 재판(再版)이 됐을 것이다. 휴전 후 7, 8년 그 상처도 아물기 전에 다시 남남(南南) 내전으로 번졌다면 「민국(民國)」은 끝장이다. 그 무서운 Consequence에 대해 헤아려 봤을 것이다.

말 못할 답답함과 불안 속에서, 일주일이 지나자 군의 주요 인사가 단행됐다. 서(徐) 장군은 육본 정보참모부장(Assistant Chief of Staff, Intelligence : G-2)으로 발탁되어 첩보부대(諜報部隊 : HID)와 방첩부대(防諜部隊 : CIC)를 지휘 감독하는 요직에 부임했다. 이제 연행(連行) 문제는 끝이 난 것이다.

5.16을 이즈음에서 마감하면서 혁명주체가 내세운 혁명공약(革命公約) 6개 사항 중 일부를 지금의 시대 상황에서 평가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공약 첫째, 둘째 그리고 셋째에 명시된 내용인 외교노선 그리고 부정부패 척결 등은 혁명의 명분을 세우기 위한 선언적(宣言的) 조항에 불과했으며 진실로 핵심이 되는 국민과의 약속은 다음과 같다.

「넷째 :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다섯째: 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자주경제의 1차적 핵심은 식량 해결과 푸르른 강산 산림녹화였다.

1971년 농진청(農振廳)을 주축으로 한 「필리핀」 IRR과의 유대로 통일벼 개발에 성공했고, 1975년 드디어 우리의 숙원인 미곡자족(米穀自足)을 달성했다. 지금까지의 국산 벼는 이삭 하나에 낱알이 80~90개였으나 통일벼는 2~3배에 가까운 120~130 지역에 따라 200~300개가 달려 있음으로서 녹색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1974년 3,000만석이던 쌀 생산량이 1977년에는 4,000만석의 추수가 이루어 졌고 밀가루 막걸리만 마시던 농민들은 15년 만에 쌀막걸리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식량자급에 관한 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집요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매년 벼베기에 참석했다.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있어서는 경제력으로 봐서 북한의 30배, 해외 사업자 진출에 있어서는 세계 180여국(余國) 전부에 나가 있다. 북한의 약 20여개국(余個國)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또한 2009년도 선진화 지수를 보면 한국은 세계에서 29위로 이탈리아 바로 다음이며 슬로바키아, 그리스, 폴란드, 멕시코 등을 앞지르고 있다. ‘우리는 선진국에 진입해 있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이 54%에 달하고 있으며, 특히 20대와 30대의 비율이 높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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