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 전임(傳任) (96회)
  제12장 KIST 시절

1971년 6월 들어 내각의 대대적인 개편이 있었다. 우리 처(處)에도 김(金) 장관이 사임하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Korea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의 초대 소장이요, 우리나라 당시의 과학기술계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최형섭(崔亨燮) 박사가 부임했다. 그동안 과기처가 하는 일에 항상 불만이었고, 관료사회 자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분이었다.

당시 유일했던 국공립연구기관이던 국립시험소 그리고 원자력연구소를 거치면서 관리분야 인사들과 많은 갈등을 겪었던 일과 연구예산 집행의 경직성들을 자주 불만으로 말하고 했다.

부임하자마자 첫 작품으로 연구조정실부터 개편하겠다는 의지를 표했다. 첫째 과학기술분야의 배경이 없고 일반행정직이 연구조정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분이었다. 언뜻 보면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과학기술행정도 특수전문분야라서 외국의 연구기관들을 보면 기술 분야 출신들도 있지만 법, 경제, 경영학 출신들도 많이 연구소에 종사하고 있음을 우리는 보아 왔다.

개별적으로 무능해서 업무수행이 곤란하다면 모르지만 도매금으로 무조건 행정은 안 된다 하면 매우 수긍하기 곤란한 일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20여년을 공직생활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내친다는 것은 관료사회의 현실을 너무 모르는 단견으로 생각되어 반발이 극심했다.

일 년이고 이 년이고 충분한 시간을 갖고 서서히 할 수 있는 일을 3~4개월 말미를 주면서 그해 연말까지 시한을 정해서 밀어붙이는 상황이 왔다. 본인은 함구하고 차관, 장관을 동원해서 압박을 해 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관계기관에 우리를 배출시킨 후, 불과 일 년이 못되어 실, 국장 행정출신들을 인사(人事)의 편의상 연구조정관, 연구심의관으로 다시 기용했던 일이었다. 매우 당황스럽고 서운했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씁쓸한 생각마저 든다.

나는 어디까지나 공무원으로 종사하고 싶었고 따라서 타 부처로 전출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갔다. 마침 농림부에 농업통계국장 자리가 신설되고 장관이 고향 선배인 김보현(金甫鉉) 씨였으므로 방문해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받아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런데 하는 말이 5년여 만에 국장자리 하나가 새로 생기면서 농림부 내 인사적체로 신음하는 서기관급 과장들 사이에서 야단이 났다고 한다.

얼마 전 농촌진흥청 지도국장 자리를 청와대인사가 차지하는 바람에 매우 입장이 난처했다는 이야기다. 이번만은 내부인사를 해야지 장관자리 못해 먹을 것이라며 오히려 사정을 하신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총리실 뿐 아니라 일부 인사들은 나의 구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돌아와서 즉시 연락하여 농림부는 안 되겠으니 그만두시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해 초가을이 시작되는 10월 어느 날, 차관 이창석(李昌錫) 씨가 불렀다. 이 차관은 평양사범 출신으로 교직에 계시다가 정부수립 후 1회 고등고시에 합격한 후 문교관료로 오래 계신 분이었다. 조정관실 개편에 대하여 매우 걱정을 많이 하는 분이었고, 나의 아버님과도 같은 공직출신으로 회의 등에서 자주 만났던 사이인지라 내 문제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말씀인즉 장관과 이야기가 되었으니 KIST에 가서 사업관리실을 맡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이어 말씀하시기를 ‘최 장관, 알지 않느냐. KIST에 「관료 냄새」도 접근시키지 아니하려고 고집이 있는데, 김(金) 조정관은 미국유학도 했고 연구실장 박사들과 호흡이 맞을 것 같아 특별히 고려한 인사’ 라고 간곡히 말씀했다. 그리고 보수체계나 이런 것으로 봐서 「책임급」으로 가면 생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 과기처 연구조정관 시절(1970.) / 바로 전 준공된 종합청사 옥상에서

모든 조건은 매우 좋았으나 다만 관직에 대한 미련 때문에 고민이 되었다.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라졌지만 당시에는 관직을 떠나면 그것으로 관료의 희망은 접어야 하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아내와 상의했고, 아버님께도 말씀드려 어느 정도 마음을 고쳐먹고 있었다. 그런데 최 장관의 지시로 12월 중순 연구조정실의 직제개편안이 국무회의에 상정된다고 한다. 이제 막다른 골목이었고 최 장관에게는 야속한 마음까지 느꼈다.

1971년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어느 날 KIST에 부임했다.

산림청 임업시험장 중앙에 자리 잡은 연구소는 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시설들도 최첨단으로 근무에 자부심을 느낄 정도였다. 미국을 비롯한 해외 여러 연구소와의 국제협력관계도 많고 해서 나의 전공을 되살리는 일들이라 의욕도 생겼다.

12월 31일 그믐날, 청량리역 근처 어느 일식집에서 신해(辛亥)년을 보내는 송년회와 나의 환영회를 겸한 회식이 열렸다. 관직을 떠났다는 섭섭함과, 새 직장 동료들과의 친교 그리고 일부 경쟁의식의 발동으로 그랬는지 통음을 하게 되었다. 오는 대로 받아 마시고 술잔 돌리는 경쟁 속에서 어느덧 의식이 몽롱해졌나보다. 화장실에 들여 속을 비우는 일대 격전을 치르고 3, 40분 후에 겨우 방을 찾아 돌아가 보니 같이 있던 연구실장 등 동료들이 모두 자리를 뜨고 없었다.

내가 술에 취해 먼저 자리를 뜬 것으로 생각했고, 통행금지가 임박한지라 모두 해산했던 것이다. 종업원들이 입혀 주는 외투를 겨우 껴입고, 도로로 나왔다.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여서 혹시 택시라도 잡을까 해서 서성거렸다. 전용차를 미리 보낸 것이 큰 불찰이었다. 가로수를 붙들고 정신 차리려 애쓰고 있는데, 교통정리를 하던 순경 하나가 다가오더니 “아저씨, 아저씨” 하며 몸을 흔드는 것이다. “아, 미안해요. 차 하나 잡아주세요.” 했더니 “통행금진데 무슨 차가 있어요!” 한다.

그런데 웬일인가, 파출소로 데려가려던 순경이 갑자기 경례인사를 부치더니 “김국장님 아니십니까?” 하면서 껴안는다. 고개를 들어 똑바로 쳐다보니 안면이 있는 순경이었다. “집이 아직 홍제동이시지요?” 하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조금 후에 백차를 가지고 왔다. 어떻게 되었는지 집에 도착할 때까지 거의 의식이 없었고, 아침에 아내의 말인즉 순경이 껴안고 왔다는 이야기였다. 베풀면 돌아온다는 은혜의 마술을 또다시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이야기인즉 이렇다.

홍제동 우리 집 어귀에는 경찰 순찰함이 있었다. 어느 날 관할 파출소 소장이 순찰하면서 나와 마주쳤다. 머뭇거리다 부탁이 하나 있단다. 고향이 강화도로, 강화경찰서에 순경으로 근무하고 있는 동생이 수도 서울로 진출하고 싶은데 총리공관의 경비로 추천해 주면 좋겠다는 진정이었다. 시골에서 서울경찰서로 진출하는 방법으로서 청와대나 총리공관에서 약 6개월 정도 근무하면 서울시내 경찰서로 배출시켜주는 특전이 있는 모양이었다.

한번 알아보겠다 하고 다음날 나의 친구 오종표(吳鍾杓) 총무비서관에게 상의했더니 이력서를 가져와 보란다. 이렇게 해서 강화촌놈(애칭) 한 순경이 약 한 달 만에 서울로 전출되었고 다시 6개월을 복무하고 청량리경찰서 교통계에 배속이 된 것이다.

명절이면 꼭 찾아오곤 해서 한(韓) 순경하고는 이래저래 안면을 유지하던 터였는데, 그믐날 만취한 나를 발견하고 현장을 동료들에게 맡기고 나를 집으로 호송해 준 것이다. 추운 겨울날 길에서 헤매거나 파출소 신세를 져야했던 순간에 은혜로 인한 구원의 손길이 작동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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