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歲時) 그리고 놀이 (162회)
  제20장 나의 성장기1

<보름>

음력 정월 보름날, 상원(上元)이라고 한다. 약밥(오곡밥), 나물과 부럼(견과류) 등을 먹는 날로 푸짐한 상을 아침에 받는다. 식사 전에 꼭 하는 행사가 있다. 새벽같이 일어나, 개구쟁이 친구에게 「더위」를 팔아먹는 것이다. 친구 이름을 부르고 그 친구가 대답을 하면 “내 더위!” 하고 소리를 지르고 도망을 간다. 세 사람 이상에게 팔면 그 해의 여름 더위는 다 해소된다고 해서 열심히 팔러 돌아다녔다. 가끔 자기도 얼떨결에 당하는 수도 있는데 그러면 몹시 화가 난다. 아침 먹고 해가 뜨면 「더위」파는 시효가 끝난다.

이제 개구쟁이들 모두 지게를 지고 톱과 낫을 챙겨 뒷동산으로 올라간다. 하루 종일 솔가지, 대나무 등을 모아 「달집」을 짓는다. 때에 따라 이웃 동네와 겨루는데 손을 보태야 한다면서, 어른 장정 몇이 나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면 그해의 달집은 거창해진다. 저녁을 재빨리 먹고 동산에 올라와 달뜨기만을 기다린다. 

동쪽 산에서 거대한 보름달이 솟아오르면 재빨리 관솔 횃불에 불을 붙이고 달집 가에 수북이 쌓아 놓은 갈잎에 불을 댄다. 활활 타오르는 달집은 주변을 환하게 밝혀준다. 건넛마을, 뒷마을 할 것 없이 일제히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어느 쪽이 더 밝고 크게 타오르는지 시합이 시작된다. 다음날 학교에서 엄청난 자랑거리가 되고 좀 왜소했던 달집마을 아이들은 쥐구멍을 찾는 신세가 된다.

불 주변에 빙글빙글 돌면서 강강수월래,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진도아리랑의 합창을 목이 터지라고 부르고 지신밟기를 한다. 그리고 달집이 다 타고 나면 마을의 개천으로 우르르 내려와 방천과 논두렁에 쥐불놀이를 시작한다. 어느 해였던지 쥐불놀이에 따라다니던 여섯 살배기 여자아이가 치마에 불이 옮겨 붙어 타오르는데 엉겁결에 냉큼 들어다 개울물에다 던졌던 일이 있었다. 다행히 머리가 좀 고시라진 정도였고 큰 화상은 모면했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달집을 거창하게 만들어 태우고, 동네 아이들이 집단으로 쥐불놀이를 강행해도 어른들이 야단치는 법이 없었다. 이유인즉 하늘로 올라간 그 많은 연기가 구름이 되고 그 구름이 비를 탄생시킨다는 믿음 때문이다. 

농촌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한발(旱魃)이다. 홍수가 지는 해는 오히려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다. 한발이 심하면 밭농사는 말할 것도 없고, 벼를 초장부터 심지 못하기 때문에 가뭄이 가장 무섭다.

나는 5대 명절 중에서 보름을 가장 좋아했다. 그 좋아하는 오곡밥을 두둑히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가장 역동적인 놀이를 즐길 수 있는 명절이기 때문이다. 사실 연중 가장 한가한 시간이 설날부터 보름까지 15일간이다. 보름이 지나면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된다. 구린내가 온 마을을 뒤덮는다. 왜냐 하면, 논밭에 거름을 내기 시작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 대보름 쥐불놀이 [출처 ; 블로그, 놀고 찍고 공부한다]

<백중>

음력 7월 15일을 백종일(百種日) 또는 중원(中元)이라 한다. 백 가지의 과일과 채소, 나물이 입수되는 시점이다. 그리고 논에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 참 어려운데 백중 직전에 논의 초벌매기가 끝나고, 그해의 풍년 여부가 가름되는 시기이다. 이때 하루 이틀 머슴들에게 휴식시간을 주고, 용돈도 주는 풍습이 있었다. 이 호기를 맞아 백중 장(場)이라는 것이 열리고 일꾼들은 장에 나가 거나하게 한잔 걸치는 망중한을 즐긴다. 

집에서는 많은 전(煎)을 부쳐 먹는 날이기도 하다. 호박전, 고추전, 감자전, 소풀전(부추전) 등 채소를 넣고 그해 타작한 새 밀가루로 전을 부치면 그렇게 구수할 수가 없다. 그리고 백중 무렵이 되면 삼이 자라서 그 껍질을 벗기기에 알맞게 익을 때이므로 삼베길쌈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다. 부녀자들의 고된 길쌈을 대비해 잘 먹고 마시고 하루를 즐기는 것이다.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큰댁 상머슴 인솔 하에 4~5명이 집단이 되어 하동 장에 간다. 그리고 씨름판에 참가해서 겨루는데 진주 등지의 「프로」씨름꾼들에게는 당할 도리가 없다. 지고 돌아서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런데 이긴 것처럼 꾸며서 제일 싼 막삼베 한 필을 사서 대나무 장대에 매달고 벌레벌레 춤을 추며 마을로 들어온다. 이것은 주인에게서 술 한 잔 얻어먹겠다는 수순이다. 이 수작을 금방 알아차린 백부님은 오히려 반기면서, “잘 했다!” 칭찬하시면서 닭을 잡고 술을 내서 푸짐하게, 코가 비틀어지도록 먹인다. 그러면 동네 전체 머슴들 그리고 머슴방에 출입하는 동네 사람들이 총집합하는 동네잔치로 확대된다. 

<추석>

음력 8월 15일, 한가위 중추절(仲秋節)은 일 년 중 가장 풍성한 날이다. 여름동안 가꾼 곡식과 과일들이 익어 수확을 거둘 계절이다. 햅쌀로 술을 빚고, 햇곡식으로 송편을 만들어 차례를 지낸다. 춘궁기의 배고픔, 무더위와 농사의 고달픔이 한순간에 머리에서 지워지는 계절이 온 것이다. 

황금의 들판만 보고 있어도 배가 부르고 넉넉함을 느낀다. 이때에는 자신의 자랑할 만한 산물을 이웃이나, 신세진 사람에게 선물로 보내는 미풍(美風)이 작동한다. 밤, 감, 배, 대추, 머루, 다래 등의 과일이 풍부하고, 살찐 전어, 도다리, 딱돔이 제철이다. 모두 차례 상에 오르는 제수(祭需)로 최적의 물품들이다.

아침 차례를 모시고 푸짐하게 한 상 받아 마음껏 포식을 하고, 산소에 성묘를 간다. 전날 머슴들이 가서 말끔하게 벌초한 묘소는 상큼한 풀냄새로 가득하다.

머슴들도 이날은 새옷으로 갈아입는다. 여름동안 입었던 삼베옷을 벗고, 주인집에서 꾸며준, 두껍직한 명베옷에 까만 조끼까지 일습을 얻어 입는 것이 관습이다. 거기에 이발까지 하면 모두 멀쩡한 미남이 된다.

우리들도 새 신발과 새 옷을 얻어 입는 즐거움이 컸다. 우리 어머니들은 계절, 명절에 맞추어 온 가족의 입성을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 바느질하는 어머니 옆에서 곯아 떨어진 우리가 자다가 잠깐 눈을 떠 보면 어머니, 누나들이 새벽까지 초롱불이나 종지불 밑에서 바느질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종종 보면서 자랐다. 지금은 사서 입히면 간단하지만, 그때는 하나하나 주부의 손에서 완성되었으니 여인네들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오후에는 백사장이나 동청 앞에서 씨름판이 벌어지고, 둥근 달이 동산에 뜨면, 매구, 농악놀이가 시작된다. 신이 많은 아낙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덩실덩실 가락에 맞춰 춤을 추고, 막걸리 취기에 온 동네가 들썩거린다. 

중추절은 푸짐하게 먹고 화끈하게 노는 날이다. 추수 때까지 아무 걱정이 없다. 비가 오거나 말거나 춥거나 뜨시거나 이제는 별 염려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최고의 평화기이다. 아이들은 게를 잡고, 물 뺀 논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어머니에게 진상하는 철이기도 하다.
 
<동지>

대설(大雪)과 소설(小雪) 사이 음력 11월 22일에서 23일 사이에 동지(冬至)가 온다. 북반구에서 태양의 남중고도가 가장 낮아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이날은 밤에 새알팥죽을 만들어 사당(祠堂)에 올리고 각 방과 장독에 팥죽을 놓았다가 식은 다음에 식구들이 모여서 먹었다. 그리고 헛간, 창고, 대문에는 팥죽을 뿌리며 악귀를 쫓는 행사도 빼놓지 않았다.

동지는 곧 다가올 설에 대비한 ‘작은 설’이라고 해 한 살을 더 먹는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 시골에서는 채권채무 관계를 정리하는 날로 이용되기도 했다. 채무를 지면 이날을 계기로 채권자와 어떠한 방법이든지 타협하여 갚기로 다시 약속을 하거나 또는 탕감을 받거나 결론을 짓고, 이듬해로 넘어가는 관습이 있었다.

우리 어릴 때는 큰 양푼에 팥죽을 쑤어 대청마루에 갖다 놓으면, 밤중에 어머니 몰래 살짝 들어가 응고된 딱딱한 윗부분을 걷어다가 설탕이나 조청을 살짝 떨어뜨려서 먹으면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일본의 「요깡」 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좋은 먹거리였다. 이런 일은 팥죽에 새알만 남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어머니의 호된 기합을 감수해야만 하는 야습행위였다.

동지에는 소학교의 방학이 시작되는 때이고, 설을 맞이하기 위한 각종 준비가 시작된다. 특히 우리 개구쟁이들에게는 연(鳶)을 제작하고, 실을 준비하고, 타래를 최고의 것으로 준비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공동 작업을 하거나, 각각 필요한 것을 교환하는, 다시 말해 상거래(商去來)를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러한 세시(歲時)와 그에 따른 여러 놀이를 통해 우리들은 심신의 건강한 성장을 성취할 수 있었고, 가족과 지역사회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익혀가는 과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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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전쟁과 진주만 공격 (16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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